이런 포도밭은 생전 처음이었다. 포도나무 사이로 온 천지가 돌덩이다. 자갈이나 돌맹이 수준이 아니라 사람이 앉아 쉬어도 될만한 커다란 바위 말이다. 있는 그대로 바위를 피해 포도나무를 심다보니 일렬로 죽 늘어선 형태가 아니라 제각각이다.
사실 포도밭 가운데 돌의 특징을 지닌 테루아는 많다. 땅 속 아래 깊숙이 암석이 있는 경우 미네랄 느낌이 인상적인 와인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자갈밭 토양에서는 강인하면서도 복합미가 좋은 와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와이너리 카이켄의 아이콘 와인 '볼더'를 만드는 포도밭은 뭔가 좀 다르다. 땅 속, 아니면 험준한 산 속 깊이나 있을법한 커다란 바위가 버젓이 올라와 있는 이 땅에서 자란 포도는 어떤 와인으로 재해석됐을까. 카이켄의 와인메이커 구스타보 오르만은 최근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일반적으로 포도를 기르지 않을 정도로 재배하기에 힘든 지형이지만 여기서 나온 포도는 독특한 풍미를 가지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며 "볼더는 큰 바위와 토착 식물들을 없애지 않고 공존하며 포도를 경작하기 때문에 테루아에서 오는 특유의 풍미가 인상적인 와인"이라고 강조했다.
카이켄은 우리나라 국민와인으로 유명한 칠레 몬테스가 아르헨티나에 설립한 와이너리다. 안데스 산맥의 양편인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오가며 사는 야생 거위가 원주민어로 '카이켄(caiquen)'이다. 야생 거위와 같은 정체성을 상징삼아 와이너리 이름을 발음하기 쉽게 철자만 약간 바꾼 카이켄(KAIKEN)으로 정했다.
잊혀지기도 힘들 돌천지 포도밭으로 다시 돌아가본다.
이 곳은 원래 강이 흘렀던 곳이다. 강이 범람할 때면 많은 돌과 암석들이 무거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물줄기가 바뀌는 이곳에 그대로 쏟아졌다. 강을 기준으로 북안은 모래나 점토가 쌓였고, 남안은 돌밭이 됐다. 볼더를 만드는 포도밭이 바로 3헥타르 밖에 안되는 그 돌밭이다.
와인 이름 볼더는 이런 테루아를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볼더(Boulder)는 영어로 '비나 바람에 의해 깎인 커다랗고 둥근 돌덩이'를 뜻한다.
볼더는 아르헨티나 대표품종인 말벡 64%에 카버네 프랑 28%, 쁘띠 베르도 8%를 섞어 만든다. 와인 메이커가 어떤 스타일을 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섞은게 아니다. 돌밭에서 자라고 있는 품종의 비율을 그대로 쓴 소위 '필드(field) 블렌드'다.
좀 더 들여다 보면 환경에 적응 또는 순응한 결과물라고 보면 된다. 말벡은 바위가 많고, 태양빛이 강한 곳에서 잘 자란다. 카버네 프랑과 쁘띠 베르도도 환경에 적응해 말벡과 같은 시기에 수확이 가능해졌다. 반면 카버네 소비뇽이나 멀롯은 척박한 곳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햇빛이 너무 강하면 포도알이 과숙된다. 매우 건조한 이곳에서 장애물 같았던 암석은 아래로 수분을 머금고 있어 포도나무가 암석 주변으로 뿌리를 뻗어내렸다. 이정도면 암석들이 남긴 무계획의 계획인셈이다.
오르만 와인메이커는 "3가지 품종 고유의 특징과 함께 돌과 자생하는 허브의 느낌이 와인에서도 잘 표현된다"며 "특히 부싯돌과 같은 미네랄 느낌은 보통 화이트와인에서 잘 관찰될 수 있는데다 신세계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이라고 말했다.
포도밭이 3헥타르 밖에 안되다보니 볼더 생산량도 3000병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적다. 조금씩 따라 한 병을 열 명이 나눠 마신다 해도 전세계에서 볼더를 마실 수 있는 이는 4만명이 안된다. 우리나라에서는 2021 빈티지가 내년 2월에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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