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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3>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년)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3>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년)

 

플라톤도 울고 갈 '이상국가'에서 인간 존재와 사회의 의미를 묻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과학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해 출생과 직업 등 인간 삶의 모든 면을 통제하는 미래 세계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 올더스 헉슬리(1894~1963년)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의 막간인 1932년에 발표했고, 당시로는 약 700년 뒤, 지금으론 약 600년 뒤 세상을 무대로 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

 

소설 속의 사회는 매우 안정돼 있다. 어떤 측면에선 인간이 유사 이래 꿈꾼 세상의 모습이다. '국가' 등에서 플라톤이 구상한 세상과 흡사하다고 느낄 법도 하다. 플라톤은 사회 구성원이 각자에게 맞는, 혹은 맡은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얘기했고, 특히 '국가'에서 그 소임 중 통치는 철인(哲人)들에게 맡겨야 하며 통치자 집단은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면서 개별적으로 아내와 자식을 갖지 않고 공동 생활과 공동 육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헉슬리가 '국가'를 염두에 두고 '멋진 신세계'를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작권은 '국가'에 어느 정도 귀속되는 셈이다.

 

철학사에서 플라톤은 심심찮게 전체주의자라고 공격을 받는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플라톤이 전체주의의 수괴가 몰리곤 한다. 플라톤의 구상은 이상주의에 기반한다. 이상주의는 종종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을 자체적으로 포함한다.

 

헉슬리의 플라톤적인 '멋진 신세계'는 안정성이 매우 높은, 또는 궁극의 안정성 단계에 도달해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더는 다른 체제로 대체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역사의 최종적인 단계, 즉 역사의 종언으로 설명했듯이, '멋진 신세계' 또한 플라톤주의 실체적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또한 더 이상의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역사인 종착점이다. 안정성이 고도로 구현돼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이상 사회이다.

 

비유로써 말하면 안정성이 높으면 방향성이 소실된다. 역사의 종점에서는 방향성이 없다. 반면 소설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야만인 세계에서는 안정성이 없지만 역동적이기에 역설적으로 방향성이 존재한다. 방향성이 있지만, 안정성은 떨어진다. 안정성과 방향성은 상쇄 관계로 볼 수 있어 하나가 커지면 하나가 줄어든다.

 

여기서 안정성이 높은 말하자면 유토피아적인 세상이 아름다우냐,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행복하고 자존하느냐를 묻는다면 소설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소설을 읽을 현재의 독자라면 작가가 제시한 소설의 무대를 일변하는 것만으로 쉽게 동의할 법하다. 그것은 현대인이 미래인이 아니어서, 또는 미래인의 관점에서 현대인이 미개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점은 전제하도록 하자.

 

소설 속 시점은 소설 발표연도(1932년)를 연상시키는 A.F. 632년이다. A.F.는 '애프터 포드(After Ford)'의 줄임말로 '포드 기원'을 뜻한다. '아노 도미니(Anno Domini)'의 줄임말인 A.D.가 주후, 즉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한 역사 산정이듯 '멋진 신세계'는 포드사가 모델T 자동차를 만든 시점을 새로운 역사의 시점으로 본다. 헨리 포드가 모델T를 처음 생산한 게 1908년이니 A.F. 632년은 소설 발표 시점으로부터 딱 떨어지는 700년 뒤는 아니다.

 

정치체제는 지금의 국민국가를 넘어서 세계정부가 들어섰고, 모든 인간은 인공 수정으로 태어난다. 인공수정이 보편적이니 산아제한을 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인구폭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소설에서 세계인구는 20억명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된다. 인공 수정과 출생, 육아 교육은 전적으로 국가가 맡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태어나기 전에 미래 인간은 지능을 기준으로 어떤 삶을 살지 미리 결정된다. 즉 계급사회로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계급으로 나뉘는데, 순서대로 더 낮은 계급을 의미한다.

 

임신과 출산을 목적으로 한 배타적인 가족 공동체가 없기에 자유성애가 기본이다. 특정한 파트너하고만 섹스하는 것은 덜떨어진 태도로 간주되며 섹스를 통해 아이를 낳는 것은 더더군다나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종종 '소마'라고 일종의 마약을 일상적으로 복용한다.

 

소설에서 야만인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주인공의 하나인 존은 인간 사이의 섹스에서 태어났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문명인인 어머니가 낙오되는 바람에 태어났다. 어머니 린다가 아들 존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셰익스피어 전집을 외우게 해 실제로 외우는 인물이다. 문명사회에 온 야만인 존이 소동을 일으키다가 마지막에 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줄거리 자체에 문명비판이 줄어 있다.

 

◆포드기원

 

포드기원을 쓰는 소설 속 세상은 분명 모종의 유토피아이다. 경험한 적이 없는 세상이지만, 유토피아는 악몽일 수 있어 보인다. 생산력이 낮은 단계에서는 굶주림과 빈곤 등을 해결하는 것이 유토피아이겠지만, 생산력이 고도화한 이후엔 그 생산력을 기반으로 더 높은 수준의 인간 존엄을 기대하게 되기에 고도 생산성을 가능하게 한 통합적인 대량 생산 체제가 인간에게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단적으로 나타났고,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는 더 직접적인 풍자로 제시된다. 전체적으로 안정성과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동시에 개인이 획일화하고 부품화한 세상이 지금 우리가 보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에 오래된 이 소설이 아직도 자주 인용되는 듯하다.

 

사회 차원에서 안정성이 높아지는 것과 인간 실존은 소설에서 반비례한다. 신세계에서는 인간 혹은 인간의 실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물론 이런 진단 또한 미래인의 교화를 받지 못한 20~21세기 인간 인식의 한계일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말자.

 

사회가 안정되면서 개인의 실존이 보장되는 적정한 조합이 어떤 수준일까. 유토피아는 둘 중 어느 한쪽을 우선하는 게 아니라 그 적정 수준을 찾아내는 것에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말 자체의 정의대로 유토피아라는 게 도달할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유토피아 논의가 현실에서 전체주의나 파시즘을 소환하기에 십상인데, 신세계에서는 사회가 놀라울 정도의 안정성에 도달했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적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주의나 파시즘과 달라진다. 역사적으로 목격한 전체주의나 파시즘은 적대적인 에너지를 최대한 긁어내고 모아서 그것을 사회 전체로 확산하고 획일화하는 과정이다. 그때는 방향성이 존재한다. 전체주의나 파시즘에서는 방향성이 확고하고 강력하게 존재한다. 신세계는 적들이 소멸한 세계정부 통치하의 전체주의 세상이라는 측면에서 이상향이다. 불편한 이상향. 신세계와 대립하는 야만인 세계 또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야만인 세계는 존엄하지 않은 실존을 드러냄으로써 사회와 개인 간의 대립 구도를 명확히 한다. 야만인 세계는 신세계의 안티테제라기보다는(혹은 신세계가 야만인 세계의 안티테제라기보다는) 사회에 맞선 개인의 표상으로 보아야 한다.

 

◆사랑에서 야만의 극복과 원시의 회귀

 

사랑의 유토피아, 정확하게는 유토피아적인 사랑이란 것이 있을까. 야만인 세계가 가지는 사랑의 고유한 논리가 신세계에 와서는 깨진 상황이 어쩌면 역으로 사랑의 유토피아에 관한 시사를 줄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곤경이란 것에서 만일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된다면 욕망과 욕정, 혹은 사랑이란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그다음에는 다양한 의미의 인정투쟁이 있겠고, 자본주의가 본격화한 뒤로는 돈이 인간사의 모든 것을 대표하게 된다.

 

포드기원이 상징하듯 600년 뒤가 아니라 지금도 자본주의에 삼켜지지 않은 곳은 지구상에 없다. 누구나 자신과 자신의 삶을 상품으로 내어놓는다. 더불어 자본에 따른 계급질서를 수용한다. 소설과는 다른 양상이지만 내용 면에서 신세계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계정부이다. 더는 저항하는 세력이 없다. 모두가 시장을 얘기하고, 돈의 신을 숭배하고, 스스로 상품으로 자임하면서 어떤 문제이든 거래로 해결하려고 하고, 보편적으로 공짜 점심이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혹은 미래에도 논란거리이다. 사랑에도 시대마다 사회적 얼개라는 것이 작용하였지만 쉽게 개인에 의해 돌파되곤 했기 때문이다.

 

소설이 보여준 것과 같은 만인 대 만인이 연인으로 존재한 시기가 인간 역사에서 있었을까. 난교 난혼 상태가 존재했다고 추정하지만 역사의 범위 안에선 목격되지 않는다. 난점인 게 섹스 또는 성교와 관련해서 인간은 이러한 물리적인 행동에 사랑이라고 부르든 무엇으로 부르든 정신 작용 비스름한 무엇인가를 탑재하길 원했다. 신세계는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만들어낸 사랑의 신화라는 걸 말살한다. 이 신세계에선 특정한 파트너에 구속됨 없이 번식 없는 섹스를 하며 그것도 왕성하게 한다. 이러한 섹스의 미래는 원시의 복원이다. 소설의 용어로는 야만의 극복과 원시의 회귀가 이뤄진다.

 

만인 대 만인이 연인이 되는 그 상황은 사랑이라고 하는, 즉 번식을 넘어서 인간적인 유대에 기반한 비(非)포유류적 인간성이 잔멸(殘滅)하는 장치가 돼 버리고 만다. 고도의 인간화가 인간을 파괴한 소설 속의 역설이다. 존재와 사랑을 극단으로 고도화한다는 사회적 구상이 이상사회를 초대할 개연성을 열지만 인간 개인에게는 이상적이지 않을 수 있고 더러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얘기는 너무 뻔한가.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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