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인터뷰] '어느 날' 김남길 "작품보는 눈 달라져…캐릭터보다 이야기"
'어느 날'서 천우희와 호흡
깊어진 눈빛·감성 연기 펼쳐
실제 성격 '해적'의 장사정과 비슷해
배우 '김남길'하면 으레 우수에 젖은 눈빛을 떠올린다. 드라마 '선덕여왕'과 '나쁜 남자'에서의 강렬한 인상 탓일까 남모를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슬픈 눈빛은 김남길만의 전매특허로 대중의 뇌리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팬이 김남길 표 눈빛 연기를 기다려왔다는 듯 이번 영화 '어느 날'에 대한 인기는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남길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설렘과 기대감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시사회 때 완성된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은 가벼운 주제를 다루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겁지 않게 잘 풀어낸 것 같다는 거였어요. 아마 이윤기 감독님의 영화 중 가장 관객이 많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합니다.(웃음)"
영화 '어느 날'은 앞서 '멋진 하루'와 '남과 여' 등 매 작품마다 섬세한 심리 묘사와 감성적인 연출로 호평받아온 이윤기 감독의 신작이다. 이 감독의 영화는 모두 챙겨봤을 정도로 평소 예술 영화에 관심이 많은 김남길. 그는 작품 제안이 들어왔을 때 고민이 많았다고 입을 열었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만 해도 저는 (영화에 대한)강박증이나 편견같은 게 있었어요. '영화라면 사실적인 것을 잘 담아내야 해'라는 주의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판타지적인 요소들에 대해 우려가 있었죠. 또 '어느 날'이 어떻게 보면 어른동화같은 느낌이거든요. 저보다 더 순수한 배우가 표현하면 더 착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시나리오를 다시 읽었을 때,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닌데 강수가 갖고 있는 아픔과 죄책감이 와닿으면서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제가 느낀 이 정서를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영화 '어느 날'은 아내가 죽고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던 강수(김남길)가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 미소(천우희)의 영혼을 보게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사람과 영혼으로 만난 두 남녀의 교감과 서서히 변화해 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많은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극 중 강수는 겉으로는 전혀 슬픈 내색을 하지 않는 인물. 실제 김남길 역시 이런 점에서 비슷하다고 밝혔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제 아픔을 주변과 나누면서까지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실제로 펑펑 울어본 적도 없고, 또 저는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나는 스타일이에요.(웃음) 강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친구에요. 울어도 소리 죽여 우는, 그리고 그게 최선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의 담담함이 더 짠하기도 하고요."
김남길은 이번 작품에서 천우희와 함께 연기했지만, '오직 강수에게만 보이는 미소의 영혼'이라는 판타지적 설정때문에 혼자 허공을 향해 연기하는 장면도 많았다. 잠시 촬영 당시를 떠올리던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둘이 먼저 연기해보고, 그대로 똑같이 혼자 했는데 어딘가 모르게 과한 느낌이 있더라"며 "슬랩스틱 코미디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닭살도 많이 돋았고, 미세한 차이이지만 조금 더 담담하고 담백하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누군가 있다고 생각하고 혼자 연기하는 건 정말 쉬운 게 아니더라"고 말했다.
함께 연기한 천우희와는 촬영 내내 실제 남매같은 케미를 자랑했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김남길은 천우희에 대해 "기본적으로 연기 센스가 좋고, 공동작업을 하면서 배려하는 게 몸에 베인 친구"라며 "배우로서 이기적이어야 할 때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일원으로서의 모습이 골고루 잘섞인, 균형잡인 배우"라고 입이 마르도록 극찬했다.
남녀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어느 날'은 멜로가 아닌 감성 판타지다. 아쉽지는 않았느냐고 묻자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게 꼭 '사랑'이라는 감정때문만은 아니지 않냐"며 "멜로처럼 보이게 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겠지만, 감독님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했던 인간의 삶과 죽음(존엄사), 그리고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 이런 본질들이 왜곡될까봐 경계했던 부분이다"라고 설명했다.
2003년 MBC 공채 탤런드로 데뷔해 드라마 '선덕여왕' '나쁜 남자' 영화 '무뢰한' 등 다양한 작품을 소화하며 연기력을 쌓아온 김남길. 데뷔 초중반 절제된 카리스마와 내면의 아픔을 가진 센 캐릭터들을 주로 해왔다면, 전작 '판도라'와 이번에 개봉한 '어느 날'에서는 조금 더 일반적이고,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들을 연기했다.
김남길은 2014년 개봉한 코믹 액션 '해적:바다로 간 산적'의 장사정 캐릭터가 딱 실제 본인 모습과 제일 흡사하다고 밝혔다.
"예전에는 홍콩 느와르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강한 이미지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센 작품들도 좋아했고요. 이제는 저의 본모습을 녹여서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요. 시간이 지날 수록 작품 보는 눈도 달라졌고요. 전에는 작품을 고를 때 캐릭터에 눈길이 갔다면, 지금은 이야기에 힘이 있고 우리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극을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작품에 관심이 가요. 그런 좋은 작품이 있다면 빨리 무릎 꿇고 빌어야죠. 제 눈에만 좋은 작품이겠어요? (웃음)"
적지 않은 나이,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이 많아짐에 따라 입지에 대한 걱정도 하는지 묻자, 김남길은 미소와 함께 "걱정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 친구들의 스타성을 저는 가질 수 없겠죠. 요즘 TV·영화에 나오는 친구들은 연기도 참 잘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저만의 강점이 있기 때문에 조바심 나지 않아요. 지금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죠. 그리고 어느 정도 내려놔야 다른 것들을 들 수 있더라고요. 제가 선배들을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후배들은 지금 제 나이대의 연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나이에 낼 수 있는 감성과 정서가 있더라고요."
김남길이 출연한 작품마다 연기력을 인정받을 수 있던 이유는 계속해서 그가 성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힘을 뺀 대신 더욱 깊어진 김남길의 연기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