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인근은 청진동의 옛 모습을 되살리기 위한 프로젝트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종로 청진동은 조선시대 부호들과 이들을 상대한 기생들이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관의 행차를 피하기 위해 서민들이 이용하던 피맛골 골목길로도 유명한 곳이다. 한때 재개발 사업으로 사라졌던 이 유산들이 복원사업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종로 르네상스'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박선기 작가의 공공미술작품인 '시점놀이(Point of View)'는 되살아난 유적 위에 설치돼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시점놀이'가 위치한 곳은 그랑 서울 빌딩의 타워1과 타워2동 사이 공간이다. 땅속에 묻혔던 조선시대 유적이 발굴된 곳이다. 작품은 발굴된 유적을 투명한 보호막으로 덮어 그대로 전시한 곳 한켠에 서 있다. 의자 위에 책이 쌓여 있고, 안경과 자명종도 보인다. 주위로 크고 작은 책들이 흩어져 있다. 마치 서재를 확대해 옮겨다 놓은 모습이다. 단지 돌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서재의 주인이 눈 앞에 나타나 책을 읽으며, 조선시대의 유물도 살펴볼 것만 같다.
작가는 이곳을 찾는 모든 시민이 서재의 주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책으로 만든 돌의자에 시민들이 직접 앉아 쉬어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 모습은 작품 위에 앉기 어렵게 돼 있다. 작가의 바람과는 다른 결과다. 그는 "전시공간이 아닌 도심속에 공공미술로 자리한 작품에 대해서는 신중해진다. 지탄의 대상이 되버리기 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굳이 작품 위에 앉아 쉬어갈 수 없더라도 작품은 시민들에게 충분한 구경거리가 돼 준다. 박선기 작가의 작품은 두세 개의 시점에서 바라본 사물을 하나로 합쳐 만들어진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보는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완벽한 입체감을 자랑하다가도 조금만 시점을 옮기면 평면 위에 그려진 회화로 일변한다. 작품의 이름이 '시점놀이'인 이유다.
작가는 "서양의 원근법이든 동양의 부감법이든 무언가를 본다는 건 늘 하나의 시점을 전제한다. 그런데 단 하나의 시점은 사실이나 진실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다. 보는 각도나 방식에 따라 실재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허구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선입견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시점'은 작가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화두다. 조각은 입체를 바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점에 대한 조작을 이러한 조각에 가하면 관객들은 재미와 함께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감각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숯'과 '아크릴 비즈' 등 수천, 수만개의 작은 조각들을 공중에 매달아 만든 작품들을 선보여 왔는데 역시 시점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그의 작품은 이같은 특징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미술계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박선기 작가의 작품은 프랑스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스위스 PKB Private 은행, 국립현대미술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삼성전자 디자인 라이브러리, 서울 신라호텔 등 전 세계 주요 컬렉션과 미술관 및 공공장소 등에 작품이 설치, 소장되어 있다. 올해 하반기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JCC아트센터에서 국내 개인전이, 해외에서는 대만에서 개인전이 예정중이다.
글:큐레이터 박소정 (info@trinityseoul.com)
사진:사진작가 류주항 (www.mattry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