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5년 국가별 회계·감사 투명성 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51개 조사국 가운데 72위를 기록했다. 국내총생산(GDP) 기준 경제규모가 우리나라의 9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짐바브웨가 40위를 기록했고, 아시아지역 최빈국 부탄이 60위에 올랐다. 당시 우리나라의 회계·감사 투명성이 이들보다 뒤처지는 것으로 평가되며, 한국의 회계와 감사 수준이 바닥권이라는 민낯이 드러났다.
올 들어선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2016년 국가경쟁력 분석' 중 회계·감사 적절성 부문에서 전체 61개국 중 61위로 최하위 성적을 기록하는 등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수모를 겪어야 했다.
최근 해운·조선업 등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잇따라 국내 회계법인의 분식회계와 부실감사 논란이 일며 이들이 자본시장의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일각에선 국내 회계법인이 자본에 '기생(寄生)'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근본적인 기업 회계 시스템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낮은 보수…회계업무 질 떨어뜨려
회계법인의 분식회계와 부실감사 논란이 발생할 때마다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이 '감사보수' 문제다. 이는 돈을 내는 기업이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를 받게 되는 외부감사 시장만의 독특한 특성에서 비롯된다.
국내 '빅4' 회계법인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이 같은 구조를 악용해 감사보수를 최대한 깎곤 한다"며 "회계법인으로선 일감을 주는 기업의 '갑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글로벌 경기 둔화도 외부감사 기업이 더 늘지 않는 상황에서 한정된 일감을 따내야 하는 회계법인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회계법인이 알아서 기업에 낮은 감사보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사업 영역이 늘어나고 회계시스템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환경에서 보수는 낮아지니 감사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선 회계감사를 귀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며 "보수도 법인의 감사의견 수위를 조절하는 수단쯤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 같은 감사보수 시스템을 해결하기 위해 공공기금을 모아 회계법인에 보수를 제공하거나, 지급 하한선을 두자고 주장한다. 다만 이는 자유경쟁 시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내 기업정서를 감안할때 실현 가능성이 낮은 편이다. 회계 학계선 결국 감사보수를 내는 기업의 태도 변화도 중요하지만 회계 업계의 자정 노력이 절실하다고 이야기한다.
손성규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감사보수 하락 문제는 시장에서 뛰고 있는 회계법인들이 직접 풀어야 하는 사안이다"며 "업계를 대표하는 한국공인회계사회나 대형 회계법인이 중심을 잡아주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견·중소 회계법인 키워 회계시장 투명성 높여야"
일감 따기가 점차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금융당국의 '외부감사인지정' 제도는 회계법인의 공통 관심사다. 이는 공정한 감사가 필요한 기업에 대해서 감사인을 금융당국이 아예 지정해주는 제도이다. 부채비율이 200%를 초과하거나 내부회계관리제도가 미비한 기업 등에 대해 회계법인을 지정한다. 외부 감사인으로 지정되면 입찰을 통해 감사를 맡을 때보다 일반적으로 감사 보수가 2배 정도 높다. 이 때문에 회계법인으로선 감사인 지정제도에 사활을 걸고 있다. 다만 이는 거의 국내 '빅4' 회계법인에 한정된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올 초 대형 회계법인이 금융감독원의 외부감사인 지정에 주목했다"며 "삼일이 15개, 안진이 12개를 받아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뒀고, 삼정과 한영이 각각 6개와 4개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중견·중소 회계법인은 이를 따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국내 '빅4' 회계법인에 집중되는 일감을 다른 중견·중소 회계법인으로 분산해야 국내 회계시장이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황인태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제회계기준(IFRS4) 도입을 계기로 최근 몇 년 동안 '빅4'의 회계법인 과점 체제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며 "시장 과점은 회계·감사의 투명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만큼 기존 회계법인을 대체할 수 있는 중견·중소 회계법인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시장에선 지난 1980년 제정된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수정론도 불거지고 있다. 회계 업계를 관리·감독하는 금융당국의 제도 개선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금융위원회는 부실감사를 한 회계법인 대표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주식회사의 외감법 개정안을 발의하려 했으나, 지난 3월 규제개혁위원회로부터 '과잉 규제'라는 이유로 철회 권고를 받았다. 현재는 분식회계와 부실감사가 발견되면 담당 임원과 회계사만 징계 대상에 올라 처벌 수위가 미약하단 지적이 잇따른다.
금융위 관계자는 "일단 규제 근거를 보완해 올 하반기 중 외감법 개정안 제출을 다시 추진할 방침"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