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을 걸으면서 시골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면 10리밖에 안 된다는 목적지가 가도 가도 나타나지 않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시골의 10리 거리는 얼마인데 이렇게 멀게 느껴질까? 10리라면 4km를 연상하고 그 거리에 익숙해져 있기에 조선시대의 10리 개념이 남아 있는 시골의 10리는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10리는 몇 km일까?
조선시대에는 주척(周尺)으로 6척을 1보로 삼고, 매 360보로 1리(里)를 삼았으며, 3600보를 10리로 삼았다. 문제는 주척이다. 주척 1자의 길이가 얼마인지 알면 조선시대의 10리 거리도 명확해지는데, 현재 조선시대 사용하던 주척 중 현존 유물이 없다. 세종 때 사용하던 주척을 참고해 10리를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1보가 주척으로 6자이므로 21.79cm×6자=1만3074cm이고, 1리는 1만3074cm×360보=4만7066cm이며, 10리의 거리는 130.74cm×3600보=47만664cm(4.7㎞)이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10리는 4.7㎞이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 기록돼 있는 서울 거리를 실제로 조사해 보면 거리의 차이가 생긴다.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돈화문을 기점으로 동대문까지는 1489보라고 적었다. 이 거리를 자동차 미터로 재보면 돈화문에서 동대문까지는 대략 2390m이다. 이를 역으로 계산하면 2390m÷1489보=1.6m이므로 1보의 길이가 1.6m이다. 이를 10리로 환산하면 1.6m×3600보=5.7㎞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법은 19세기 말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부터 사용했고,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도량형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10리와 조선시대의 10리는 분명히 그 거리가 달랐다. 시골길의 10리는 아직도 조선시대의 풍습이 남아 4.7㎞나 5.7㎞이다. 조선시대 주척의 단위가 명확하지 못해 조선시대 10리의 거리를 분명하게 밝히지는 못해도.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