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남녀 10명 중 9명은 단체카톡방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크루트·알바콜
#. '카톡, 카톡, 카톡' 직장인 김지영(가명·31) 씨는 오늘도 회사 단체카톡방 알람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지영 씨, 어제 내가 말한 자료 언제까지 줄 수 있어?" 메시지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6시 10분. 출근 전부터 업무 지시를 내리는 상사 때문에 김 씨는 휴대전화를 부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의 소원은 회사 단톡방을 나가는 것. 퇴근 후에도, 휴가 중에도 밤낮없이 울려대는 단톡방 알람 소리에 김 씨는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시간과 장소의 구애 없이 사람들 사이에 활발한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타인과의 24시간 연결로 개인 삶을 위협, 현대인의 스트레스 원흉으로 지목받고 있다.
특히 카카오톡 단체카톡방으로 인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대한민국 성인남녀는 평균 5.9개의 단톡방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의 10명 중 8명이 단체카톡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30일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아르바이트 O2O 서비스 알바콜은 성인남녀 835명을 대상으로 단체 카톡방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같이 나왔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단톡방에 참여 중인 응답자는 전체의 94%에 달했다. 몇 개의 단톡방에 소속돼 있는지 확인한 결과 평균 5.9개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를 유형별로 분류해 보니 친목·정보교류 성격이 26%로 가장 많았다. 회사(소속팀, 부서)와 동기(학교, 회사) 관련 단톡방 참여 비율은 각각 18%였다. 가족(14%), 동아리·스터디·팀플(11%), 오픈채팅방(7%)이 뒤를 이었다.
응답자의 82%는 단톡방 스트레스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람들은 알람이 쉬지 않고 울릴 때(23%)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외에 답장을 기다리거나 요구받을 때(13%), 퇴장하기가 곤란할 때(13%), 과잉 친목 도모가 부담스러울 때(12%), 단톡방에서 나가면 왕따가 될까 봐서(11%), 친한 멤버들끼리 편을 가르거나 그들만의 대화에 소외감 느낄 때(9%), 추측성 찌라시나 음란성 메시지, 동영상 등을 공유 받았을 때(3%)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건 회사 단톡방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 717명을 대상으로 퇴근 후 카톡 금지법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의 87.7%가 관련 법안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퇴근 후 메신저로 업무 지시를 받은 경험이 있는 직장인은 85.5%에 육박했다.
조재희 중앙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휴대폰의 단문 메시지 서비스(SMS) 기능은 텍스트 기반이며 실제 업무수행에 필요한 자료를 공유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카카오톡과 같은 모바일 인스턴트 메시지(MIM)는 실질적으로 필요한 업무자료를 공유함으로써 일과 삶의 경계를 크게 허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예를 들어 업무 시간 이후 상사가 부하 직원들과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다음날 발표할 파워포인트 자료를 업로드하고 이에 대한 검토를 지시할 경우 직원들은 항시적 연결 상태에 놓이게 되고 결국에는 일과 삶의 균형을 잃게 된다"고 꼬집었다.
독일의 자동차회사인 폴크스바겐은 근로자의 휴식시간에 업무상 연락을 기술적으로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근로시간 종료 30분 이후 회사 스마트폰의 이메일 기능을 차단한다. 서버는 다음 날 근무 시작 30분 전에 재가동된다. 폴크스바겐의 단체협약을 적용받는 근로자들은 오후 6시 15분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와 주말에는 스마트폰으로 업무와 관련된 이메일을 받지 않아도 된다. 다임러는 모든 직원에 대해 휴가기간 또는 5일 이상의 부재 시에는 도착한 이메일을 직원의 요청에 따라 자동으로 삭제하게 돼 있다. 이메일 발신자는 부재중이라는 정보와 함께 대체업무 수행자의 연락처를 받게 된다.
국내에서도 퇴근 후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카톡금지법이 발의됐지만 현재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2016년 6월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근로시간 외에 카톡 등 각종 통신수단을 이용해 업무지시를 내리는 것을 금지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내놨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근로시간의 경계를 허무는 스마트기기의 보편화는 근로자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이는 번아웃 증후군 같은 현상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며 "그럼에도 이에 대한 입법적 대처나 노사공동의 대응은 아직까지 활발하지 않다"고 밝혔다.
김기선 부연구위원은 "정신적 스트레스로부터 근로자의 안전 및 보건을 보호할 수 있는 입법적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제언했다.
회사 단체카톡방처럼 모든 단톡방이 유해한 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직장갑질 119'다. 직장갑질 119는 지난 2017년 11월 출범한 시민단체다. 노무사, 변호사 등 약 150명의 노동 전문가로 구성됐다. 이들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노동 관련 무료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오픈카톡 등을 통해 들어온 제보는 총 2만2810건으로 하루 평균 62건에 달했다.
이승길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과 같이 통신망과 인터넷망이 고도로 발달된 조건에서 카카오톡은 커뮤니케이션의 실현 가능성이나 양적인 측면에서 큰 강점을 지닌다"고 진단했다.
구진경 산업연구원 서비스산업연구실 부연구위원은 "카카오톡은 빠르고 편리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조직원 사이에 신속한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 있다"며 "1대 다수의 대화가 원활한 카카오톡의 시스템은 조직원 간 친밀성을 높이는 동시에 집단 지성을 발현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