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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희망 2019] ③ 김성희 교수의 우주여행, 탄소섬유에 상상 엔진을 달다

김성희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의 2017년작 'life, String and the Universe(삶, 끈과 우주)'. 사진 가운데에 태양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솟아있다. 양쪽에선 눈을 감은 여인들이 헤드폰으로 태양의 소리를 듣는다. 이들은 태양에 연결된 탄소섬유 끈으로 소통하고 있다. 김 교수는 물리학자들의 '끈 이론'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끈 이론은 다차원 우주의 매우 작은 끈과 막이 우주를 구성한다는 이론이다./김성희 교수



창조의 조건은 이질적인 존재의 충돌이다. 빅뱅 이후 지구가 그렇게 태어났고, 과학과 예술의 만남은 인간의 번뜩이는 영감을 자극해왔다. 우주선 재료로 우주를 그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탄소섬유는 알루미늄보다 가벼우면서 강철보다 10배 이상 강해 우주선과 항공기 소재로 쓰인다. 한국 최초의 탄소섬유 예술가(카본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김성희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는 "과학과 예술의 공통분모에서 창의성이 피어난다"며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면 폭발적 아이디어가 샘솟게 된다"고 설명했다. 지상에서의 우주여행을 꿈꾸는 그를 지난 6일 충북 중원대에서 만나봤다.

김성희 교수가 6일 중원대학교에서 메트로와 인터뷰 하고 있다. 과학자와 예술가의 교류가 활발한 유럽에서 융합적 사고 방식에 익숙해진 그는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이 상상력이라고 설명했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를 공부하면서 학교에서 창의적 수업 하는 일을 꿈꿨습니다. 예술은 가르칠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저는 창의성 교육을 하고 싶어 한국에 왔습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폭발적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에 매력을 느끼니까요."/이범종 기자



◆우주를 꿈꾸는 아이

김 교수는 어린시절부터 낮보다 밤을 더 좋아했다. 한밤중에 일어나 마루에 나가면, 달빛 아래 강강술래가 펼쳐지는 상상을 했다. 부모님, 친구들과 손 잡고 맴도는 모습은 줄곧 스케치북에 담겼다. "텔레비전에서 본 모습을 떠올리며 그렸는데, 배경이 항상 밤이니까 선생님과 부모님께서 걱정하셨어요. '이제는 낮도 그리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남과 다른 시각과 재능은 중학교 시절에도 두드러졌다. 처음 그려본 정물화로 반에서 1등을 하고, 정면 풍경화를 그리기 싫어 원근법을 강조해 건물 옆 모습을 그렸다. "평면을 싫어하는 성격 덕분에 포스터는 '꽝'이었어요."

고등학교 입학 직후 화실 분위기에 반해 미술을 시작한 그는 1988년 중앙대 조소학과에 진학했다. 처음엔 보수적인 아버지께서 학교로 그를 '잡으러' 온 적도 있지만, 어머니의 지지로 원하는 진로를 택할 수 있었다. "당시 '미술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태어나 한 번도 선택이라는 것을 해 본 적 없는 어머니께서 '너는 이 시대에 태어났으니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하시더군요."

김 교수의 2017년작 'Whisper of night sky(밤하늘의 속삭임)'. 탄소섬유 바탕에 자개를 활용했다./김성희 교수



하지만 대학생활은 해방구가 되지 못했다. 김 교수는 아버지의 뜻대로 4년 내내 기숙사에만 살아야 했다. 학교 교육 과정도 기대와는 달랐다. 나무·철·돌 등 전통적인 재료로 깎기와 붙이기 같은 제작 방식만 배우는 현실에 낙담했다. "당시 백남준 선생님의 비디오아트 같은 것을 기대하고 들어갔는데, 학교는 변화가 없더군요. 한편으로는 학생과 스승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외국 영화 속 대학을 동경했어요. 아버지 요구로 자취 대신 기숙하고 학과 모임이나 엠티 한 번 간 적이 없죠."

답답한 학교 생활 끝에는 원치 않는 결혼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대 여대생은 3학년에 선을 보고 4학년 봄에 약혼해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는 풍토였다. 도망쳐야 했다. 4학년이 되자 필리핀에 있는 선배에게 연락해 어학연수 거처를 마련한 뒤, 아버지께는 교수와 유럽여행을 간다고 거짓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김 교수 부부는 결혼 이틑날인 1995년 1월 8일 배낭을 매고 유럽으로 향했다. 20년 영국 생활의 시작이었다. 아내는 과학과 예술의 융합, 남편은 생명공학을 공부했다. "대학원 시절, 방 한 켠에는 생명공학 책으로 가득했어요. 그런데 이 작은 DNA가 우리의 미래를 바꾼다는 생각에 매료됐지요. 제가 남편에게 우주나 인간 생명에 대해 물으면, 과학자의 대답이 돌아와요. 그럼 바로 머릿속에 작품이 떠오르게 되죠. 과학과 예술은 각자의 독특한 영역이 있지만 공통분모도 있어요. 거기에서 창의성이 피어납니다." 김 교수가 2007년 노팅엄 트렌트대(Nottingham Trent University)에서 DNA 구조를 창작의 원천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은 배경이다.

김성희 교수가 6일 '과학기술과 예술' 수업에서 청주 직지금속활자 문양 USB를 구상한 류호균 씨와 3D프린터로 만든 모형을 들고 토론하고 있다. 류씨는 "USB부터 도마, 보조배터리까지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에 직지금속활자 문양을 활용하기로 했다"며 "이번 수업으로 4차 산업혁명에 한 발짝 다가가는 기회가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이범종 기자



◆작품도 강의도 '융합 우주선'

김 교수와 탄소섬유의 인연은 술자리 농담처럼 시작됐다. 노팅엄 트렌트대 한국문화학과 교수이자 국제교류팀장이던 그는 2012년 전북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맞으며 탄소섬유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탄소산업 발전을 모색하던 전북과 한국탄소융합기술원(KCTECH) 관계자들이 영국 6대 복합재 연구소 중 하나인 AMRC연구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100년 된 동굴 펍(Pub)에서 에일맥주를 마시는데, '과학예술 하는 당신이 탄소섬유 작품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저는 가볍게 '와이 낫(Why not·왜 안되겠느냐)?' 이라고 대답했지만, DNA 조형 작품 활동 등 하던 일이 있으니 잊고 지냈죠."

김 교수는 먼저 귀국한 남편과 외로워하는 아들, 멀리 떨어진 부모님 생각에 2014년 2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20년간 영국에서 받아온 명함을 전부 버렸다. 타시 태어나고 싶었다. "한국행 비행기에서 어두운 창밖을 보는데, '이제는 넓은 것을 하자. DNA가 아닌 우주를 다루자'고 결심했어요. 본질적으로는 우주공간도 DNA처럼 끝없이 성장하고 변하기 때문에 같은 영역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김 교수가 2015년 '제10회 국제탄소페스티벌'에 선보인 'Medici Love'./김성희 교수



그해 기술원 특강을 계기로 탄소섬유와 다시 만난 김 교수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특강을 마치고 탄소섬유에 대해 설명을 듣는데, 가슴이 막 뛰어요. 조각가들은 새로운 재료를 보면 사냥꾼의 눈을 갖게 되죠."

검은 탄소섬유는 어린 시절 즐겨보던 밤하늘과 우주를 떠올리게 했다. 문제는 표현 방식이었다. "집에서 어머니와 수다를 떠는데, 방에 있는 자개장이 갑자기 눈에 확 들어와요. '저거다!' 탄소섬유에 자개가루를 뿌리면 행성과 별들이 펼쳐지잖아요. 그대로 실행하니, 탄소섬유 예술의 선두주자인 독일에서도 하지 않은 방식이었어요. 제가 최초라는 사실에 신이 났습니다." 국내 첫 카본 아티스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김성희 교수의 꾸준한 활동으로 탄소 섬유 작품의 인지도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올해 1월 방영된 드라마 '리턴'에서 주인공 최자혜 변호사 사무실과 펜트하우스에 나타난다. 김 교수는 2017년 12월 제작진의 부탁으로 작품을 협찬해줬다./김성희 교수



김 교수는 2015년 전북도와 전주시가 주최한 '제10회 국제탄소페스티벌' 특별초대전을 시작으로 다양한 탄소섬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주로 우주의 한 부분이자 그 자체인 나와 이웃들의 생성과 소멸을 다룬다.

탄소섬유는 매력적인 소재이지만, 다루기가 어려워 작품 활동 장소가 제한적이다. 김 교수는 정부 과제로 2014년부터 2년간 탄소섬유 전신주 디자인을 맡고, 탄소페스티벌에도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을 작업실로 쓰게 됐다. 탄소섬유 작품을 만들려면 금형에 재료를 넣고 진공상태로 굳혀야 하는데, 이 과정이 까다로워 기술자들과의 협업이 필수다. "엔지니어들이 옆에 있으니 언제든 질문을 던질 수 있어요. '이게 가능합니까'라는 물음은 그 분들에게 지적 자극이 됩니다. 예술가를 친구로 둔 사실을 그 분들도 좋아합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죠."

김 교수가 추구하는 융합은 그의 강의에서도 이어진다. 이날 3D 프린팅을 주제로 한 '과학기술과 예술' 수업에서는 청주 직지금속활자 문양을 본딴 류호균(국제통상학과 4학년) 학생의 USB 모형을 두고 도마, 보조배터리 등 여러 아이디어가 파생됐다. 단순한 과제물을 넘어 지역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는 시제품을 만든다는 목표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창의성 교육을 위해 미대가 아닌 교양학부 교수를 지망한 김 교수의 보람이다.

'나의 고향(My Hometown)'을 주제로 김성희 교수와 이택구 화백이 만든 조형물과 그림. 이 작품들은 지난 11월 코엑스에서 열린 '제13회 국제탄소페스티벌'에 전시됐다./김성희 교수



◆더 많은 작가들과 우주 넓히고파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카본 아트의 불모지를 개척하는 일은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카본 아트는 한국 미술계에서 '넌 뭐니?'라고 묻는 위치예요. 미술계에서는 관련 기사도 나오지 않죠. 하지만 꾸준한 전시로 인지도가 쌓였고, 이제는 해볼 만 하다 싶어 이번달 한국미술가협회에 가입했어요. 내년에는 미술계에서도 카본 아트가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대문예술문화원 이택구 화백과의 협업은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작품 'My Hometown(나의 고향)'은 지난 11월 전북도와 한국탄소융합기술원, 프랑스 복합소재기업 JEC가 코엑스에서 공동개최한 '제13회 국제탄소페스티벌'에 전시됐다.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탄소섬유를 이야기하면, 젊은 작가는 '한 번 그려 볼게요' 하지만, 30년을 한지에 그려온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시도했다가 잘못되면 안 되잖아요. 하지만 이 화백은 한지보다 보존성이 뛰어난 탄소섬유라는 재료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번 협업을 계기로 많은 실험과 관련 행사가 이어지면, 탄소 페스티벌은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작가들이 탄소 섬유 작품을 고민하고 전시하는 진짜 축제가 될 것 같아요. 벌써 가슴이 뜁니다. 내년에는 탄소섬유에서 많은 열매가 열리지 않을까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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