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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희망 2019] ① ‘제주도 호빗’ 서명숙의 올레길, 세계를 ‘평화반지’로 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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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포기해온 새해 계획에 얼굴이 빨개지는 연말이 왔다. 그 많던 계획을 세운 건 남들의 시선인지, 아니면 진짜로 되고 싶은 미래의 나였는지 여전히 헷갈린다.

이 어려운 질문에 온몸으로 대답해온 사람들이 있다. 길과 길을 잇거나 계란으로 바위를 깨거나, 성공의 기준에 굴복하지 않은 반항아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걷든 뛰든, 너 자신을 믿어라.’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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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에게 '방문객 통계'는 의미가 없다. 경험의 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는 감동의 정도와 경험의 질, 이런 것이 (숫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봐요. 10만명이 제주의 속살을 제대로 알고 다녀가면, 1000만명 이상의 감동에 견줄 수 있을 테지요. 반면에 당장 1000만명이 왔어도 다시는 안 오고 한때 유행으로 끝나면 의미가 없어요."/제주올레



사람의 욕망을 반지에 비유한 소설 '반지의 제왕'은 우리 마음 속에 열한 번째 손가락이 있다고 암시한다. 누구나 세상의 영욕을 다스릴 반지, 그 모든 욕심을 채워줄 유일 반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지를 내려놓고 세상이란 손가락에 둥근 길을 끼워주는 이도 있다. 지난달 10일 인사동 찻집에서 만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싫증도 잘 내고 겁도 많지만, 하고 싶은 일에는 무모하게 덤빈다. 너무 하고 싶어서 올레길을 냈다"고 말했다. 초록 두건과 상의를 입은 그의 옆에는 몸의 절반에 달하는 배낭이 부풀어 있었다. 숲 속 요정의 옷을 입고 절대반지를 없애려 길을 떠난 호빗, 겁 많고 용감한 프로도의 모습이었다.

지난 10월 개장한 일본 '미야기 올레'는 규슈 올레(2012년)와 몽골 올레(2017년)에 이은 제주올레의 세 번째 자매길이다. 제주올레는 내년 베트남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제주올레



◆영초언니 따라 나선 '반지 원정대'

서 이사장이 제주올레라는 '큰 반지'를 만든 배경엔 참혹하게 아름다운 20대 시절이 있다. 제주도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1976년 고려대에 입학한 명숙은 '고대신문' 기자 생활로 독재시대를 절감했다. 입법반지·사법반지·행정반지를 지배하는 절대반지의 주인 사우론. 사람들은 그를 박정희라고 불렀다. 학창시절 배운 '한국식 민주주의'의 실체를 알게 될 무렵, 졸업한 신문사 선배 천영초를 만났다. "영초언니 같은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만나지 못했어요. 지혜롭고 집요하고 다정했지요. 민주화 운동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의 결정을 기다렸어요. 똑같은 사람은 없다는 걸 인정하는 분이었죠."

이후 수유리에서 영초언니와 자취한 시절은 여성이 학생운동의 조연에 머물던 고대에서 큰 위로가 됐다. 고대 여학생 10명이 책 읽고 토론하는 모임 '가라열(열 사람이 여성해방·독재타도·노동자 해방의 길로 간다는 뜻)'을 만들고, 구속된 학생들에게 내복을 전달했다. 이들 중 한 명인 생물학과 선배 이혜자가 학생들을 이끌고 학교 정문 옆 경찰 가건물을 부수며 야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명숙은 밤새 시위 촉구 유인물을 찍어 이웃 대학들에 배포했다. 같은 뜻, 저마다의 방식으로 절대반지를 파괴하려는 '반지 원정대'였다.

하지만 남자친구와 혜자 언니의 구속 이후 모임은 시들해졌고, 명숙은 어머니의 부르튼 손을 보며 "비겁해지기로" 했다. 영초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숙을 보내줬다. 그는 프로도의 선택을 존중하고 함께 걸어준 마법사 간달프였다.

안도감은 잠시. 명숙은 영초언니 자취방에서 만든 유인물이 발각돼 모진 고문을 받다 성동구치소에 수감됐다. 영초언니는 독방에 끌려갔다. 1979년 4월이었다.

그해 9월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명숙은 236일만에 석방돼 고향 서귀포로 돌아왔다. 절대악 사우론이 법의 심판 없이 허망하게 쓰러진 직후였다. 하지만 고향에서 명숙을 기다린 건 빛보다 빠른 소문과 잔인한 시선들이었다. 그는 훗날 올레 7코스가 된 외돌개 주변 솔숲을 지나 폭풍의 언덕(서 이사장이 너럭바위에 붙인 별명)에 앉았다. 바다를 타고 삭풍이 불어왔다. "그때는 걷는 즐거움을 몰랐어요. 다만 누군가의 관심이나 천 마디 말보다는 '말 없는 자연의 응시'가 내 가슴을 쓸어주고 위로하는구나…. 올레의 씨앗은 이때 싹을 틔웠지요."

프로도가 반지를 없애는 데 성공한 이유는 지름길만 부지런히 내달려서가 아니다. 가끔 쉬었기 때문이다. 제주 올레의 상징인 네모난 말의 이름 '간세(사진 속 모형)'는 게으름을 뜻하는 서 이사장의 별명 간세다리에서 따왔다. "올레꾼은 되도록 천천히 갔으면 해요. 구름도 봤다가 좀 멈춰서 한없이 멍 때리다가…. 우리는 운동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걷기를 통해서 일상을 털고 제주를 느꼈으면 해요." 사진은 제주올레 6코스 우정의 길인 스위스 체르마트 5개 호수길./제주올레



◆'내 안의 절대반지' 버리니, 올레가 찾아왔다

박정희 정부는 사라졌지만, 군부독재라는 절대반지는 전두환의 욕망을 자극했다. 결국 두 번째 암흑의 탑이 세워졌고, 시간은 1987년 6월을 피해가지 못했다. 결국 반지는 두 개의 탑과 함께 파괴됐다. 2년 뒤 '시사저널' 경력기자가 된 명숙은 정치부에서 전쟁같은 취재를 이어갔다.

어느새 서명숙 기자의 마음 속에선 또 다른 절대반지가 욕망을 속삭였다. 특종과 더 높은 지위, 영향력이었다. "남이 못 쓴 기사와 탐사보도, 새로운 시각의 칼럼을 위해 23년을 달렸어요. 수많은 소송과 함께 피로감도 쌓였죠. 특히 모르는 걸 아는 듯 지시해야 했던 황우석 사태 때 절망했습니다. 이미 기자생활에 대해 고민하던 때여서 절대반지를 던지기가 어렵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죠." 2006년 7월 사직서를 던진 그는 치유를 위해 스페인 산티아고 800㎞ 순례길에 오른다.

잊혀진 올레의 뿌리가 마음 속 지층을 뚫고 나온 계기는, 그곳에서 만난 영국인 활동가의 신랄한 비판이었다. '24시간 미친듯이 일하고 마시며 질주하는 한국인에게는 걷기를 통한 치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제주도에 이런 길이 있다면 산티아고 못지않게 아름다울텐데'라고 생각했어요. 서울 살 때 외면했던 제주의 돌담과 유채꽃이 떠올랐죠. 주차장과 입장권으로 나뉘어진 제주 명소를 길로 연결하면 그 사이에 있는 삶과 정서, 역사가 숨쉬는 길을 볼 수 있을텐데. 그런데 그 여자가 '네가 길을 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잖아요. 그렇게 마지막 '그 지점'을 탁 건드려줬지요. 민주화 운동 때 영초언니가 하나의 시선을 더해줬듯이."

이후 동생과 시사저널(現 시사IN) 후배들이 길을 내는 데 합심해, 2007년 9월 서귀포 시흥리에 첫 올레길을 냈다. 손수 돌을 고르고 나무에 끈을 묶어 방향을 알렸다. 5년 반 만에 제주 해안을 한 바퀴 도는 425㎞ 26코스가 완성됐다. 길 위에 집과 사람과 자연이 연결된 올레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2박 3일 관광지였던 제주도는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달 살이 여행지가 됐다. 일본과 몽골에 수출된 올레는 내년 베트남 진출도 앞두고 있다.

서 이사장이 염원하는 세계 평화의 길, '피스 올레(Peace Olle)'를 향한 여정도 시작됐다. 그는 지난 9월 산티아고에서 열린 월드 트레일즈 네트워크(World Trails Network) 컨퍼런스에서 국제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돼, 피스 올레를 제안했다. 서 이사장이 하루 빨리 내고 싶은 길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강제 징집됐다가 제주도에 정착하신 아버지의 고향, 함경북도 무산행 올레다. "산티아고에서 가장 충격적인 기억은, 프랑스 국경인 생 장피드포르 마을에서 두 발로 스페인에 걸어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아버지의 땅도 못 가봤는데' 하는 생각에 울컥했죠. 지프차 운전기사였던 아버지는 생전에 통일이 되면 우리를 그 차에 태워 무산까지 가겠다고 말씀하곤 하셨어요. 이번 홍보대사직을 수락하면서 이사회에 '올레를 전세계 사업으로 가져가자'고 제안해 채택됐습니다. 길 없는 곳을 잇고 분쟁지역 간 소통의 길을 뚫자고. 특히 일본 규슈와 미야기 올레는 한일 민간외교의 무대라고 볼 수 있죠."

서명숙 이사장이 지난 9월 산티아고에서 열린 월드 트레일즈 네트워크(World Trails Network) 컨퍼런스에서 제주올레를 소개하고 있다./제주올레



◆결국 돌아오는 행복, "살암시민 살아진다"

올레 생각에 한껏 부푼 그의 표정을 바꾸고 싶다면 '어느 코스가 제일 좋으냐'고 물으면 된다. 길도 사람처럼 살아있기 때문이다. 햇볕의 강도와 날씨, 마주친 사람에 따라 그날의 풍경은 달라진다. 인생도 그렇다. "꽃길만 걸으라는 사람의 곱고 애틋한 의도는 좋지만, 인생에는 영원한 깔딱이 고개도 꽃길도 없어요.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레의 풍경이 기대와 달라 실망하던 사람들이 고생끝에 '짠' 하고 나타나는 예쁜 바닷길을 보고 놀라요. 꽃길만 걸으면 아름다움과 감사함을 인식하는 데 둔해져요. 과거 올레길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평소 나를 한껏 치켜세우던 세상의 손가락질에 절망해 자살충동을 느낀 적도 있어요. 입장료를 받거나 세금을 쓰지도 않았는데, 길을 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준 일이 폄하돼 괴로웠어요."

가장 따뜻한 손을 내민 사람은 제주올레를 반대했던 해녀 할머니였다. "넋이 나가 두문불출하다가 바닷가에 잠시 나갔어요. 그 분이 아무말 않고 딱 한 마디 하더군요. '살암시민 살아진다.' 계속 살면 살게 된다는 뜻이거든요.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안다, 이 고비 넘기면 볕들 날 온다는 말씀이죠. 산전수전 공중전 백병전 다 겪은 분이 온 생애를 담아 해 준 말씀이예요." 지난 8월 기준 구직 포기자가 182만4000명에 이르는 현실에서, 서 이사장이 청년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제주올레는 도시 청년 세 명을 초청해 10월부터 4달간 제주에서 머물게 하는 '청(靑)정(停)지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길을 걸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돌파구를 찾아보라는 의도다.

서 이사장의 초대장에는 교정시설에 수감된 청소년들도 적혀있다.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과 2000㎞를 걸으며 사회의 문턱을 넘도록 돕는 프랑스 사회단체 '쇠이유(Seuil·문턱)'가 모델이다. "작년부터 법무부에 말하고 있어요. 저는 징벌로는 청소년 범죄 해결에 한계가 있다고 봐요. 자기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야 하는데, 자연만큼 사람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주는 건 없어요. 지금 아이들은 디지털 환경에서 많은 자극에 노출돼 있고, 비좁은 공간에서 경쟁에 내몰리죠. 여기서 탈락한 애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쇠이유도 현지에서 어떤 교정시설에 가뒀을 때보다도 재범율이 낮아졌다고 합니다. 소수의 학생부터라도 선생님이나 공직자 출신 자원봉사자, 길 위의 선생님과 대자연에서 소통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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