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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⑪ 삼엄한 군사시설,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신하다

평화문화진지는 군사시설인 대전차방호시설을 개조해 만들었다./ 도봉문화재단



서울 최북단 도봉산역 2번 출구. 형형색색 등산복 행렬을 따라 나오면 서울창포원이 보인다. 지난 1일 오후 이곳을 찾은 이유는 왼쪽 샛길 너머 안개처럼 깔린 1층 건물 '평화문화진지'를 보기 위해서다. 먼저 도착한 어린이들은 낮고 기다란 건물을 '기차'라고 불렀다.

평화문화진지는 1969년 북한의 남침 대비용으로 지어진 콘크리트 구조물 '대전차방호시설'이었다. 유사시 콘크리트 벽을 폭약으로 부숴 전차 등 적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지어졌다. 1층은 군사시설, 2층~4층에는 군인 거주 아파트가 들어섰다.

1969년 세워진 대전차방호시설. 1층에는 군사시설이 2층부터 4층에는 군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가 세워졌다./ 도봉문화재단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사이, 방호시설은 낡아갔다. 2004년 군사시설로 지정된 1층을 제외한 나머지 거주공간은 서울시 안전진단 평가에서 E등급을 받아 철거됐다. 방호시설은 이후 10여년 간 도시 미관을 해치는 흉물로 전락했다.

도봉구는 도시재생 관점으로 발상을 전환했다. 구는 2014년 12월 서울시로부터 예산 26억5000만원을 받아 방호시설 재생사업에 나섰다. 2016년 12월 재생에 들어간 방호시설은 공사 1년만인 지난해 10월 문화 예술 창작공간으로 거듭났다.

도봉구가 독일로부터 무상 기증받은 '베를린 장벽' 앞에서 가족들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김현정 기자



◆삼엄한 군사시설이 어린이 놀이터로

평화문화진지는 1902㎡ 규모에 5개 동으로 구성된 지상 1층짜리 건물과 평화광장, 전망대로 조성됐다.

원목 판재로 둘러싸인 1층 건물에는 시민동·창작동·문화동·예술동 등 5개의 공간이 왼쪽 끝부터 차례대로 들어섰다. 이곳에서는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나 주민 대상 목공 교실이 열린다.

두꺼운 콘크리트 방호벽이 5개의 동을 감싸고 있다. 복도처럼 길게 늘어선 방호벽에는 가로 두 뼘, 세로 한 뼘 크기의 직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다. 어린이 여럿이 팔을 넣었다 빼며 장난치는 이 구멍은, 유사시 탱크가 포신을 넣을 자리였다.

건물 1층 옥상에서는 주거 공간을 철거하고 남은 철근과 과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던 콘크리트 구조물을 볼 수 있다./ 김현정 기자



주민들은 총성 대신 웃음이 퍼지는 이곳을 자랑스러워했다. 손주들과 시설을 둘러보던 도봉동 주민 유영기(80) 씨는 "어떻게 버려진 군부대시설을 문화 공간으로 살려낼 생각을 했는지 정말 대단하다"며 엄지를 세웠다. 유씨는 "평화문화진지 덕에 황무지 같은 동네가 개발도 되고, 후세에 남겨줄 수 있는 문화유산도 생겼다"며 웃었다.

방호시설에는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도 담겼다. 시설 한가운데에는 도봉구가 외교부와 통일부 협조로 독일에서 무상 기증받은 베를린 장벽 한 덩이가 세워져 있다.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온 정영임(39) 씨는 "아이들이 책으로 접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전쟁의 참상이나 분단의 고통 등을 직접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놨다"며 "이곳에서 아이들이 통일을 꿈꿀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도봉구는 지난해 10월 대전차방호시설 공간재생사업으로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지속가능발전대상 수상 기관으로 선정됐다. 평화문화진지는 또 유엔 환경자문기관인 이클레이(지속가능발전 지방정부 네트워크)에 한국 대표 사례로 소개된 바 있다.

평화문화진지를 찾은 시민들이 보도블록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곳을 아슬하게 지나쳐가고 있다./ 김현정 기자



◆개장 반년 지났지만… 2% 부족한 시설정비

1층 콘크리트 복도를 따라 나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면 2~4층 군인 주거 공간을 철거하고 남은 철근과 콘크리트 구조물이 보인다. 붉게 녹슨 철근이 불규칙하게 솟아나 있다. 서울시는 시민 아파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역시 그대로 남겨 놓았다.

가족들과 평화문화진지를 찾은 이은정(36) 씨는 정신없이 아이들을 살피기 바빴다. 이씨는 아이들에게 "안 돼, 위험하니까 거기로는 가지마!"라고 연신 외쳤다. 이씨는 "재생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건물 파손 흔적까지 그대로 두었어야 했나'라는 의문이 든다"며 "이런 건 너무 보여주기식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서울시 관계자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무너질 일은 절대 없다"며 "군사시설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웬만한 벽체보다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좌) 평화문화진지 건물 뒤편에 건축 폐기물이 쌓여있다. (우) 한 어린이가 길 위에 뿌려진 건설공사용 모래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다./ 김현정 기자



건물 밖 평화광장에서도 부모들의 걱정은 이어졌다. 자녀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최모(33) 씨는 "시설정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것 같다"며 "보도블록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곳이 몇 군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고 왔는데 지나가다가 걸려 넘어질 것 같아 걱정"이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평화문화진지는 서울창포원과 동북권 체육공원으로 둘러싸여 있어 킥보드나 자전거, 유모차 등을 가지고 봄나들이에 나선 이들이 많았다. 시민들은 보도블록 공사 중인 현장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도봉동 주민 김영미(62) 씨는 "벌려만 놓고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김씨는 "건축 폐기물들이 곳곳에 쌓여 있고, 길은 전부 모래투성이"라며 혀를 찼다.

서울시 관계자는 "8일 개장하는 동북권 체육관을 공사하기 위해 건축자재를 실은 무거운 차들이 광장 위를 지나다녀 잔디가 망가지고, 보도블록이 침하됐다"며 "체육관 공사가 마무리되는 즉시 시설정비를 마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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