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역, 이재효의 '0121-1110=113062' /류주항
5호선 광화문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나무토막들이 쌓여 길고 매끈한 쐐기 모양의 조형물이 보인다. 나무의 매끄러운 속살이 인상적이다. 배경인 센터포인트빌딩 유리외벽과도 잘 어울린다. 밤에는 작품 재료인 밤나무 속살이 조명을 받아 따뜻한 색감이 두드러진다.
광화문역, 이재효의 '0121-1110=113062' /류주항
이 작품은 국내외에서 최근 가장 약진하고 있는 조각가이자 설치 미술가로 꼽히는 이재효(51) 작가의 '0121-1110=113062'이다. 암호처럼 느껴지는 작품명은 실은 작가의 이름과 제작연도를 나타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01'은 모양이 비슷한 '이', '21-1'은 역시 닮은 꼴인 '재'를 가리킨다. '110=1'는 시계방향으로 90도 만큼 회전시켜 세우면 '효'의 모양이다. 나머지 숫자가 제작연도다.
광화문역, 이재효의 '0121-1110=113062' /류주항
작품의 중심에는 쇠파이프가 있다. 뼈대 역할을 한다. 작가는 뼈대에 나무를 볼트로 고정해 엮어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그리고는 나무를 잘라내고 마감한 후 표면에 왁스를 칠했다. 뙤약볕과 비바람, 눈발이 날리는 야외에 설치되는 만큼 야외에서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오일 스테인 작업도 거쳤다.
광화문역, 이재효의 '0121-1110=113062' /류주항
그가 재료로 선택한 밤나무는 화목용 땔감으로는 가치가 높지 않다. 하지만 구하기가 쉽고 적당한 굴곡이 있어 작가에게는 훌륭한 소재다. 이처럼 그는 주변에 흔하면서 가치가 낮은 재료들을 작업의 모티브로 삼는다. 나무, 돌, 낙엽, 못 등이다.
광화문역, 이재효의 '0121-1110=113062' /류주항
주변에 널린 재료들은 작가의 손을 거쳐 질서를 가진 하나의 집합체로 재탄생한다. 하나의 재료를 수백에서 수만 개까지 엮어내고 꿰어내고 메어낸 결과물이다. 작품 아래쪽 설명글에서 작가는 "모든 사람들이 지나간 곳, 모든 예술가들이 지나간 곳에 남아 있는 볼품 없는 것들, 쓸모 없어진 것들, 아름답지 않은 것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런 흔한 것들로 나는 작업을 한다. 볼품 없는 못들이 하나하나 모여 재즈가 되고 쓸모 없는 휘어진 나뭇가지들이 모여 웅장한 클래식이 된다"며 "한 명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와 열명, 스무 명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는 분명 다를 것이다. 왜 다다익선이라고 했을까. '일즉다, 다즉일'의 세계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양평 스튜디오에서 메트로신문과 인터뷰 중인 이재효 작가(오른쪽). /류주항
그렇다고 작가가 일정한 메시지를 관객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 작품설명을 요청했더니 그는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을 때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며 "제 작업에 어떠한 의미나 메세지를 담고자 한 의도도, 감상자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도 없다. 내용이 중요하기보다 작품을 철저하게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술은 그 자체만으로 또 다른 언어"라고 했다.
작품 제목에 별다른 메시지를 담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제 이름을 상징한 숫자와 제작연도만을 조합시킨 제목은 보는 사람이 다르게 느끼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제 작업을 우연히 마주친다면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 작품이 아닌, 가슴으로 느낄수 있는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양평 스튜디오 내 이재효 작가의 작품 /류주항
지난달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마친 작가는 다시 올 가을 영국 런던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연달아 전시회를 여느라 그 준비로 요즘 분주하다. 작가의 양평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도 작업이 한창이었다. 워낙 해외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호응이 뜨겁기 때문에 쉴 틈이 없다.
양평 스튜디오 내 이재효 작가의 작품 /류주항
그의 작품은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 호텔, 세계 각지의 파크 하얏트 호텔, 스위스 제네바 인터콘티넨털 호텔, 코넬대학, 두바이 에마타운 등에 소장돼 있다.
국내에서는 W워커힐 호텔에 소장된 작품이 대표적이다. 청량리역, 천호사거리, 가산디지털단지역 부근 등 도심 한가운데서도 그의 대형 설치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려고 한다.
글:큐레이터 박소정 (info@trinityseoul.com)
사진:사진작가 류주항 (www.mattry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