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은 없다는 말을 좋아해요. '허삼관'의 출연과 연출을 제안 받았을 때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딱 하나만 고민했어요. 이 영화를 연출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말이죠."
첫 장편영화로 데뷔한 신인 감독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두 번째 연출작을 결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제 아무리 유명한 배우 출신 감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신인 감독' 하정우(36)가 데뷔작 '롤러코스터'를 마치자마자 다음 연출작으로 '허삼관'을 선택했다는 소식이 놀라웠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정우에게 '허삼관'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먼저 배우로서의 끌림이 있었다. 2011년 제작사 두타연의 안동규 대표 제안으로 읽게 된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는 독특한 캐릭터와 문체까지 자신의 "코드"와 잘 맞는 작품이었다. 역할 나이 때문에 마흔 살이 넘어서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원작 소설의 판권 계약 문제로 예상보다 빠르게 출연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감독이었다. 안동규 대표로부터 주연과 감독 모두 제안을 받게 된 그는 쉽지 않은 도전에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불가능은 없다"는 삶에 대한 태도가 무모한 도전을 현실로 만들었다. 예상대로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고민의 나날이 이어졌다. '롤러코스터'보다 약 14배가 많은 67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만큼 '멘붕'이 계속됐다.
"마침 최동훈 감독과 함께 '암살'도 같이 준비하고 있었어요. 최동훈 감독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원래 감독을 하다 보면 세 번 정도 멘붕이 온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완벽한 시나리오가 어디 있느냐'며 '배우 하정우를 믿어봐라'라고 조언해줬어요. 그 말에 힘을 얻어 배우 하정우가 촬영장에서 최대한 집중할 수 있게끔 철저하게 준비했어요."
그런 하정우 감독의 노력이 스크린에 잘 녹아들었기 때문일까. 완성된 영화는 매끄러운 각색과 연출이 눈에 띈다. 방대한 원작에서 가족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춘 선택과 집중, 그리고 인물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연출력은 하정우 감독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허삼관'이 흥미로운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정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연기한 허삼관은 세 아이를 둔 가장이지만 근엄함과는 거리가 먼 철부지 아빠다. 하정우는 "남자는 결혼해서 아빠가 돼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허삼관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전혀 아버지 같지 않은 지점이었어요. 자기 내색도 다 하고 감정도 다 드러내죠. 아버지이기 이전에 철없는 남자라고 생각해요. 그게 현실이죠. 저 역시도 허삼관처럼 자식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스스럼없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더 테러 라이브'를 시작으로 '롤러코스터'와 '군도: 민란의 시대', 그리고 '허삼관'까지 배우와 감독 작업을 병행해온 하정우는 당분간 배우 일에만 전념할 계획이다. 촬영 막바지에 접어든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마친 뒤에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의 촬영이 들어가는 5월까지는 "묵은 때를 벗겨낼"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언젠가는 우디 앨런 감독처럼 희망과 긍정의 기운을 나눌 수 있는 작품들을 또 다시 연출하고 싶다. 하지만 마흔 살을 넘기 전까지는 감독 일은 잠시 미뤄둘 생각이다.
"당장은 배우로서 경험을 더 쌓으려고 해요. 좋은 감독님을 만나 작업을 하다 보면 세 번째 연출작에서는 지금보다도 더 깊이와 밀도가 생겨나겠죠. 지금 저는 감독이 돼가는 과정에 있으니까요."
사진/김민주(라운드테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