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인사동 입구 쪽으로 걷다 보면 왼쪽으로 높다란 담장이 나온다. 성인 키의 두세 배를 훌쩍 뛰어넘는 규모라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쪽에 뭐가 있는지 알기 힘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한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2008년 이래 3만7천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송현동의 이 땅을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부지를 사들인 대한항공이 자칭 7성급 호텔을 짓겠다고 나선 탓이다. 정부도 관련법 개정을 추진하는 등 맞장구를 치고 있다. 서울 옛도심의 중심, 특히 경복궁과 가까운 곳에 고급호텔이 들어서면 고용 창출에 기여할 수 있고 관광산업 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다.
참교육학부모회 등 시민단체들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부지 바로 옆에 덕성여중고와 풍문여고가 있어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미 지난 2010년 대한항공이 서울중부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지만 대법원까지 올라가 결국 기각당한 적이 있다. 현행 학교보건법상 학교 정후문에서 직선거리로 50m 이내의 절대정화구역에는 호텔이나 모텔, 여관 같은 숙박시설을 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은 정부 주장처럼 7성급 호텔이 고용을 창출하는 등 사회적으로 도움이 될 지부터가 불분명하다. 2014년 6월 경실련이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자료를 활용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호텔을 건립해 늘어나는 일자리라고 해봐야 저임금의 임시·일용직 일자리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문제의 땅은 구한말 이래 늘 '손님'의 땅이었다. 1920년경 들어선 조선식산은행 직원 숙소가 그 시초다. 조선식산은행은 요즘의 산업은행처럼 산업 금융을 담당했지만 실상은 조선총독부의 외곽 기구에 가까웠다. 해방 뒤에도 굴곡진 운명은 이어졌다. 미군정 시설을 거쳐 2000년대 초반까지 주한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쓰인 것이다. 만약 거기에 고급 호텔까지 들어서면 일반 시민의 접근은 앞으로 더욱 힘들어질 것이 자명해 보인다.
예부터 송현동 일대는 지리적으로 동서로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잇고 남북으로는 인사동과 북촌을 이어주는 역사와 문화의 징검다리를 해온 곳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개발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민비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감고당(感古堂)이나 세종 때 처음 지어진 안동별궁(安洞別宮) 등의 흔적은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그나마의 터마저 돈의 논리에 밀려 바람 앞 등불 신세가 되어 버렸다.
공공의 이익보다 사유재산권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제3자가 남의 땅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기업과 시민 사이의 중재는커녕 일방의 이익을 위해 관련법 개정에 나서는 정부가 더욱 야속해 보인다. 관광산업의 경쟁력은 호텔 숫자가 아니라 잘 보존된 역사문화 경관이 보장해줄 수 있는데도 말이다.
/ '다시,서울을 걷다'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