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2012년 2월 한 대학병원 레지던트가 인턴에게 의약물을 무단으로 투여한 사실이 적발됐다. 임상시험이라는 명목 아래 선배의 이름으로 명령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건이다. 또 같은 해 8월 다른 대학병원에서는 환자가 병원 내 고객소리함에 민원을 넣었다. 정형외과 교수가 별다른 이유 없이 전공의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는 내용이다.
이 두 사건은 병원 안에 만연한 '갑을'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부당하거나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을'의 위치에 놓인 의사들이 아직도 수두룩한 것이다.
#2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법은 동아ST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의사들에게 최대 3000만원의 벌금형과 리베이트 제공 금액에 대한 추징형을 선고했다. 이에 대한의사협회는 성명서를 통해 동아ST가 검찰과 법정에서 입장을 바꿨다며 회원들에게 동아ST 영업사원의 출입을 금지하고 제품 처방을 하지 말라고 전달했다.
의사들이 집단적으로 처방을 반대하는 일은 법적으로 불공정거래 행위 소지가 명확한 담합이다. 하지만 '의사=갑, 제약사=을'이라는 공식이 지배하는 갑을 관계라 제약업계는 가만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병원과 제약사 간 갑을 관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같은 흰 가운이지만 피라미드 속에서 사는 의사들
사실 보건의료계, 그중 병원과 의사의 갑을 문화는 병원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도 이 땅에 의대가 들어선 후부터니 꽤 오래된 사실이다. 즉 같은 흰 가운을 걸치고 있지만 엄연히 서열이 존재하는 ▲인턴 ▲전공의 ▲임상강사(펠로우) ▲교수가 피라미드식 갑을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들의 직급 때문인데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교수 아래에서 전공의와 임상강사들은 을이 된다. 하지만 이들은 인턴들에게 또다른 갑이 된다.
특히 '펠노예'라 불리는 임상강사는 수술 어시스트, 회진과 같은 본인 업무는 물론 지도교수의 논문 작업과 잡무를 모두 떠맡아 처리한다. 심할 경우 교수실 청소와 운전기사 노릇까지 할 때도 있다. 그래서 펠노예라고 명명된 것.
문제는 이 피라미드식 갑을 관계가 절대 깨질 수 없다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대학병원의 교수 자리, 개원의로서의 성공까지 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데 지도교수의 입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절대 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이 지도교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 전공의 한 관계자는 "힘들어도 신분 노출을 꺼려서 문제 해결은 커녕 상담이나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묵인된 관습으로 인해 약자가 더욱 약해져 스스로 이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고 꼬집었다.
◆영업사원을 자살까지 몰고가는 '슈퍼 갑'
이와 함께 병원과 의사들은 제약사에게 영원한 '슈퍼 갑'이 된다. 제약사의 의약품을 써주는 주체가 의사이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을 모시게 되고 이런 관행이 리베이트로 자리 잡은 것이다. 다시 말해 제약사에 있어 병원과 의사는 회사의 매출과 생존을 결정하는 존재이며 병원과 의사는 처방전을 무기로 온갖 갑질을 하는 횡포를 부리고 있다.
이런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안 나선 것은 아니다. 정부는 지난 2010년 11월 리베이트를 주는 제약사와 리베이트를 받는 의사나 병원 모두를 처벌하는 쌍벌제를 도입했다. 문제는 쌍벌제 도입을 건의한 한미약품이 철퇴를 맞았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집단적으로 한미약품의 의약품 처방을 거부했고 한미약품은 당시 창립 이후 처음으로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갑을 관계를 재확인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 지난 2월 재시행된 시장형 실거래가제(저가 구매 인센티브제)로 인해 대형병원들은 올해 1월 제약사에 공문을 보냈다. 기존 계약을 파기하고 계약서를 새로 쓰자는 내용이다. 약가를 최대한 낮춰서 지불하고 정부로부터 인센티브를 받겠다는 병원의 전략으로 제약사는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면 해당 병원과의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제약사 한 관계자는 "아마도 병원·의사와 제약사의 갑을 관계를 개선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리베이트 문제와 매출, 영업 현실 등으로 제약사 영업사원이 자살했다는 보도가 공공연하게 나오게 된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국민 건강을 명분으로 자신만의 이해를 추구하는 의사 집단이라는 슈퍼 갑의 존재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병원·의사와 제약사 간의 갑을 관계를 허물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갑이 되는 병원
또 병원은 도매상을 상대로 언제나 '늦장 결제'를 일관해오며 갑의 위치에서 군림해 왔다. 도매상이 병원에 의약품을 공급하고 약값을 받아야 하지만 평균적으로 8개월 이상이 지난 후에야 결제를 하는 관습이 만연해 있다. 올 2월 이를 개선하는 약사법 일부 개정안이 임시국회에 상정됐지만 이 역시 무산됐고 현재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만한 특별한 방안이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도매상이 병원에 항의할 수는 없다. 결제를 받지 못하면 도매상은 생존을 위협받지만 참고 넘어가야 다음에도 의약품을 공급하는 갑을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원은 의약품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금융 이자 소득을 부득이하게(?) 챙기고 있다.
게다가 병원에서 의료사고가 나는 순간 환자는 철저한 을이 된다. 서비스적인 측면에서 보면 의사가 '을', 환자가 '갑'이 돼야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고객인 환자가 갑이 아닌 을의 위치에 선다. 특히 환자 입장에서는 의료사고가 나도 소송을 진행하지도 못한다. 피해자가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규정이 존재해서다. 정부가 출범시킨 한국의료사고분쟁조정중재원에 조정을 신청하면 가능성이 있지만 이 역시 강제 조정이 아닌 임의 조정에 그치고 있어 물증이 없는 환자는 언제나 철저하게 을의 위치에 있게 된다.
약국도 을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처방전을 받아 약을 처방하는 약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치로 의사나 병원은 처방전을 무기로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슈퍼 갑인 의사와 병원의 다재다능함이 빛나는 순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