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사정이 어지간만 하면 한양 사대문 밖에 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중략) 그것도 힘들거든 사대문 가까운 곳에서는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여러 가지 보고 듣는 게 많고 기회들이 많다."
'서울문화, 그 정체성을 묻다'의 저자인 송도영 한양대 교수는 "누구보다도 백성의 삶을 근심하면서 관리의 임무는 결국 민본주의임을 역설했다고 알려진 다산 정약용조차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위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며 "지방에서 생활하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서울은 그렇게 애증의 복잡한 감정적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조선의 서울인 한성은 전국의 인재들을 빨아들이는 도시가 됐고, '사람이 새끼를 낳거든 서울로 보내고 말이 새끼를 낳거든 제주도로 보내라'는 소름 끼칠 듯한 속담이 당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사대문과 사소문은 조선의 초대 왕 태조 이성계가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권을 과시, 외부 침입으로부터 도읍지를 보호하고자 1397년 한양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운 성문이다.
◆홍화문→혜화문, 개칭 이유는?
보슬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재 혜화문(창경궁로 307)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혜화동 로터리 방향으로 270m(도보 약 4분 소요)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혜화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공사 현장 안전 고깔이 설치됐고, 그 앞에는 접근금지 표지가 붙어 있었다. 현재 보수 중이니 북문을 이용해달라는 내용의 안내문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아담한 정자 하나와 벤치 두어개, 공중 걷기와 허리 돌리기를 위한 운동기구, 음수대 등이 마련된 쉼터가 나왔다. 정비를 위해 쉼터 이곳저곳에 빙 둘러놓은 '위험, 안전제일' 테이프는 누군가가 거칠게 잡아 뜯은 탓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화단에 버려진 하늘색 여행용 캐리어가 처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쉼터와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혜화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 성북구에는 한양도성의 동북쪽 작은 문 '동소문'이 자리한 지역이라 해 동명이 '동소문동'인 곳이 있다. 창건 당시 동소문은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렸으나, 성종 때 지은 창경궁의 동문에 같은 이름이 붙으면서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이름을 갈았다.
◆다락 천장에 용 대신 새긴 봉황, 왜?
혜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 구조로 정면에서는 지붕이 사다리꼴로, 측면에선 삼각형으로 보인다. 영조 때 없던 문루를 지어 올렸으나 1928년 없앴고, 홍예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1938년에 소실됐다.
혜화문은 다락이 낡고 헐었다는 이유로 왜인의 손에 의해 헐렸다. 1928년 전차가 뚫리며 사라졌고, 1939년엔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해 아치 석재부 마저 없애버렸다. 지금의 혜화문은 1992~1994년 복원 공사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본래보다 북쪽에 문루와 홍예를 새로 지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다른 성문의 다락 천장에 용 그림이 새겨진 것과 달리 이곳엔 봉황이 그려졌다. 이 부근에 새로 인한 피해가 커 이를 막기 위해 새들의 왕이라고 하는 봉황으로 제압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성북구 삼선동에는 과거 '봉황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의 마을명 역시 새가 주는 피해를 막기 위해 주민들이 봉황정이라는 정자를 세운 데서 유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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