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가 경쟁 치열해지며 고객 기대 부응 넘어 '초과 만족' 목표
높은 CAPA 쫓아 가는 과정에서 안전 무시 되기 일쑤
먹고 마시고 쉬는 일상을 모두 관통하는 유통산업의 뒤편 노동자에 드리워진 그늘이 짙다. '고객을 위해' 제조, 물류, 서비스 현장에 투입된 이들은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유통업계의 목표를 위해 고강도 위험 노동에 시달린다. 근무복을 벗으면 고객이 되는 노동자들의 노동권은 유통업계에 없을까.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지나는 동안 e커머스 업계의 스탠다드는 '새벽배송'이 됐다. 고객이 주문하면 12시간 전후로 배송을 완료하는 새벽배송과 퀵커머스는 e커머스에 고객을 록인(Lock-in)하는 가장 강력한 전략으로 떠올랐다. 기업 간의 경쟁 속에서 더욱 가혹한 노동환경 속으로 내몰렸다.
지난달 29일 열린 유통물류서비스업 야간노동실태와 노동자 건강영향 연구 결과 토론회에서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마트 온라인 배송기사의 90%는 주당 60시간을 초과하는 장시간 노동과 1년 내 사고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넘어짐(52.8%), 부딪힘(66.2%), 교통사고(45.8%)가 특히 흔한 가운데, 큰 부상으로 이어지는 물체에 맞는 사고(29.6%), 절단·베임·찔림 사고(19.7%)도 경험자가 많았다.
이 같은 결과를 발표한 김형렬 가톨릭대 의대 교수는 "현재 새벽배송을 담당 중인 야간 배송자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40대 이하)기 때문에 건강문제가 가시화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건강 측면에서 이들이 더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 환경의 문제도 지적된다. 직매입을 전제로 하는 새벽배송에 필요한 대규모 물류센터는 건립에 긴 시간과 거액의 비용을 필요로 한다. 이에 물류센터 없이 후발주자로 뛰어든 주요 대기업은 이미 구축한 오프라인 점포(대형마트 등)을 물류센터로 재활용하고 있다. 문제는 기존 마트의 유휴공간을 온라인 주문 처리를 위한 공간으로 바꾸면서 확보되지 않은 충분한 작업공간이 작업자의 긴장도를 높인다.
최민 직업환경의학과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마트 물류센터 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일한다'는 항목에 "근무시간 대부분 혹은 내내"라고 답한 노동자는 이마트 68.3%, 홈플러스 50.8%로 절반 이상이었다. 1년 내 사고 재해를 경험하지 않은 노동자는 10명 중 1명 꼴에 불과했다.
백남주 서비스연맹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롯데마트의 스마트스토어, SSG닷컴의 이마트 PP(Picking&Packing, 집품·포장)센터, 홈플러스의 이커머스 등이 이런 방식을 활용한 예"라며 온라인 주문 처리와 점포내 물류 저장고로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서로 다른 업무를 처리하려는 노동자간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있었던 이천 쿠팡 덕평 물류센터 화재 사고는 토론회에서 지적된 물류센터 내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들의 총체가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경기도 이천시에 소재한 쿠팡 덕평물류센터 화재는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관 1명이 순직케 한 사고로, 화재 진압에 엿새나 소요됐다.
당시 직원들을 중심으로 조기 진압할 수 있는 화재를 쿠팡 측의 안전불감증과 내부 통제가 키웠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휴대전화를 출근 직후 모두 제출해 신고할 수 없었고, 관리요원들이 이상현상을 신고해도 무시했으며 경보설비는 아예 꺼뒀다는 것이다.
쿠팡 관련 시민단체 활동가는 "기밀을 다루는 시설도 아닌데 물류센터에서 휴대전화를 출근 시 모두 가져가고, 경보설비는 꺼두고 노동자들을 동요케 하지 않은 것은 기업이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노동자로서의 안전이나 복지보다는 할당량을 정확한 시간 내에 다른 생각 할 틈 없이 처리하는 게 기업에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하면서 심야노동 제한과 물류산업의 노동강도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은 힘을 얻고 있다.
쿠팡노동자의 건강한 노동과 인권을 위한 대책위원회 김혜진 집행위원장은 "물류센터의 경우 반드시 야간노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근로기준법에 야간노동을 규제하는 내용을 넣거나 영업시간을 규제하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다"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창고·물류센터 노동자의 할당량과 관련해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규정을 도입한 것처럼 물류산업에서 노동강도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지난 10월 벌어진 평택 SPL 제빵공장 끼임 사망 사고는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거대 기업 SPC그룹의 계열사에서 30만원을 아끼기 위해 설치하지 않은 자동 방호장치 때문에, 2인1조여야 하지만 일손이 부족했다는 변명으로 벌어진 23살 파견직 젊은이의 사망사고는 인재(人災)였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SPL은 해당 공장에 있는 소스 혼합기 9대 중 7대에 자동방호장치(인터록)를 설치하지 않았고, 혼합기의 덮개도 열어놓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노조 측은 "그동안 공장 직원들이 안전 펜스 설치 등을 요구해 왔지만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사망 사고가 발생하기 일주일 전에도 다른 생산 라인에서 손 끼임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연이은 사고가 회사의 안전불감증으로 발생한 인재라는 정황이 밝혀지면서 불매운동이 일기도 했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와 함께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안전 경영 시스템 강화에 1000억원 투자하겠다고 공언했다. SPC는 SPL 사고 후속 대책으로 안전경영위원회를 출범했고, 지난달 24일 SPL 및 파리크라상 성남 공장, 샤니 성남 공장 등 주요 사업장들을 방문해 현장을 점검하고 노조와 간담회를 가졌다.
SPC는 안전관리 강화 대책에 따라 외부 전문기관을 통해 전 사업장에 대한 산업안전 진단을 실시해 현재 28개 생산시설 중 24개 사업장에 대한 진단을 완료했으며 순차적으로 개선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SPL 제빵공장과 비슷한 환경을 가진 곳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5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4일 유제품 제조업체 비락 대구공장의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 B씨가 우유박스를 세척실로 이동하는 설비에 몸이 끼는 사고를 당했고 병원으로 이동했지만 사망했다. 비락은 hy(한국야쿠르트)의 100% 자회사다. 해당 사고 또한 끼임 사고를 막을 '인터록' 안전장치가 부재하면서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노동자들이 시달리는 고강도 업무가 결국 허명의 '고객만족'에서 온다고 지적하고 여기에 더해 '유통산업'이 상대적으로 타 산업군에 비해 안전불감증이 심한 수준이라고 비판한다. 시민단체 활동가는 "유통산업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관계가 있어 실제 고객을 기업이 마주하게 된다"며 "이 과정에서 실제 고객의 기대를 충족하는 것을 넘어 더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게 되는데, 그 압박감은 결국 최전선에 선 노동자들이 모두 감내해야 하는 몫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전선에 선 노동자가 고객을 마주하게 되면서 결국 안전에 대한 의식은 낮아지고 고객의 '감정'이 먼저 고려되는데, 고객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볼 일"이라며 "기업만의 몫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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