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임금인상이 고물가 상황을 심화시킨다."
"경쟁적인 가격·임금의 연쇄 인상이 물가·임금 연쇄 상승의 악순환을 초래해 경제·사회 전체의 어려움으로 귀결된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보면 동의하기 힘든 주장이다. 무슨 근거로 저런 얘기를 했는지도 의문이다. 마치 지금의 고물가 현상이 기업의 임금인상 때문이란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그런데 더 이해하기 힘든 건 이런 논리가 시장경제를 옹호한다고 공언한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 총괄 수장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얼마 전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단과의 간담회에서 저런 요지로 발언했다. 그는 주요 대기업 오너·경영진들에게 "물가상승 분위기에 편승한 경쟁적인 가격·임금의 연쇄 인상이 물가·임금 연쇄 상승 악순환을 초래해 경제·사회전체의 어려움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감안해달라"며 "생산성 향상과 원가절감 노력 등을 통해 가격 상승 요인을 최대한 자체 흡수해 주시기를 각별히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위 잘 나가는, 여력이 큰 상위 기업들이 성과보상 또는 인재확보라는 명분하에 경쟁적으로 높은 임금상승을 주도하고 있다"면서 "과도한 임금인상은 고물가 상황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임금격차를 더욱 확대해 중소기업, 근로취약계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고,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우려가 있다"고도 했다.
상대적 박탈감을 키운다는 건 맞는 말이지만 논리가 너무 비약됐다. 대기업들은 우리 경제를 주도하는 큰 역할을 하지만 대기업에 종사하는 임직원들은 전체 근로인구의 약 7.4%다. 그들의 임금이 인상돼 나라 전체의 물가가 오르고 임금이 연쇄 상승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는 건 개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5일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물가 상승률 자료에서도 물가상승을 주도한 요인은 기름값, 외식물가, 국제곡물가 등 주로 공급 측 요인이 컸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에 지구온난화 등으로 인한 기상 이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농축수산물의 원가가 오른 것도 전 세계적인 고물가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상황이다.
부총리가 임금을 비용에 가까운 것처럼 보는 시각도 문제다. 임금이 비용인지 투자인지 우리나라에선 논쟁꺼리지만 세계적인 추세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라고 본다. 그래서 글로벌 기업들은 우수인재 확보를 위해 '과도한 임금'뿐 아니라 '휴먼 리소스(HR)'나 '인적자본관리(HCM)'란 이름의 전문부서에서 최첨단 IT솔루션을 활용해 사람 관리를 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부총리 말대로 생산성을 초과할 정도로 '과도한 임금'을 주는 게 아니다. 이들의 경쟁자인 글로벌기업들에게 인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임금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부총리의 이번 발언이 대기업들의 임금인상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인다. 임금수준은 노사가 결정할 사안이지, 정부가 간섭할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총리의 말을 들은 대기업 경영진들은 부담을 가질 게 뻔하다. 정부 고위 관계자의 이런 압박은 기업의 발목을 잡지 않겠다는 현 정부의 철학과도 배치된다.
무엇보다, 경제 전문가들은 지금의 고물가보다 앞으로 다가올 경기침체를 더 걱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올 연말께 물가인상은 잡힐 수 있지만 경기가 침체하기 시작하면 그 때는 우리 경제 전체에 고물가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당장의 급한 불도 중요하지만 경제정책 수장과 재계의 만남에서는 보다 장기적인 시각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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