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100주년] 희망의 궁전, '딜쿠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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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주년] 희망의 궁전, '딜쿠샤'는 어떤 곳?

최종수정 : 2019-08-25 13:16:39

복원 전 딜쿠샤 현황. 서울시
▲ 복원 전 딜쿠샤 현황./ 서울시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세계에 알린 미국 AP통신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가옥 '딜쿠샤'가 2020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힌두어로 '희망의 궁전', '이상향'이라는 뜻을 가진 딜쿠샤는 미국의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가 1923년 지었다. 영국과 미국의 주택양식이 혼합된 형태로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대지 462㎡, 총면적 623.76㎡)로 조성됐다. 일제 강점기 근대 건축의 발달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손꼽힌다.

지난 23일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인 딜쿠샤 모습. 김현정 기자
▲ 지난 23일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인 딜쿠샤 모습./ 김현정 기자

25일 서울시에 따르면 딜쿠샤 복원 공사는 2020년 7월 8일 완료된다. 공사는 지난 2018년 11월 9일 시작됐다. 현재 건물 내부 내진구조보강과 변형 벽돌 벽체 해체·설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세워진 '희망의 궁전'

1926년 화재 이전 딜쿠샤 모습. 서울시
▲ 1926년 화재 이전 딜쿠샤 모습./ 서울시

앨버트 테일러는 한국에 처음으로 쇄광기를 들여와 금광사업을 시작한 광산 사업가인 아버지 조지 테일러를 따라 1896년(고종 33년) 조선에 온 미국인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평안도의 운산 금광 감독관을 지내고 충청도의 직산 금광을 직접 운영했다. 그는 '노다지'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호황을 누렸던 금광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테일러는 1917년 서대문 근처의 작은 벽돌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의 두 번째 저택이 종로구 행촌동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딜쿠샤다. 딜쿠샤는 18세기 인도 러크나우 지역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궁전의 이름이다. 연극배우 출신으로 동양 각지를 순회공연하던 메리는 인도에서 딜쿠샤를 찾아갔고 폐허가 된 이곳이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집을 갖게 되면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이겠다고 마음먹었다.

앨버트 테일러. 서울시
▲ 앨버트 테일러./ 서울시

메리 테일러. 서울시
▲ 메리 테일러./ 서울시

한국생활 초기 테일러 부부는 서울의 옛 성곽길을 걷다가 집채만한 크기의 은행나무를 발견했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이 손수 심은 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 여겨 소원을 비는 당산(堂山)이었다.

테일러 부부가 은행나무 옆 1만여평의 땅을 사들여 집을 짓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신령한 땅을 외국인이 망가뜨린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공사는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진행됐다. 우여곡절 끝에 1923년 집이 완성됐다. 테일러 부부는 딜쿠샤의 머릿돌에 'DILKUSHA 1923, PSALM CXXVII-I(시편 127장 1절)'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딜쿠샤는 붉은 벽돌로 이뤄진 복층 구조로 거실, 응접실, 서재, 드레스룸, 식품 저장실, 하인들의 방 등이 갖춰져 있었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어두운 오크색 목재로 만들어졌다. 2층에는 메리의 화실이 있었으며 꼭대기의 작은 방에는 한국에서 수집한 예술품이 전시됐다. 1층 거실의 너비는 14m에 달했는데 2층의 응접실과 함께 서울 시내의 풍경, 건너편의 안산 그리고 멀리 남산과 한강이 보였다.

◆3·1운동을 세계에 알리다

앨버트 테일러가 고종국장을 취재하면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진. 서울시
▲ 앨버트 테일러가 고종국장을 취재하면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진./ 서울시

서울시는 1995년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추정되는 붉은 벽돌의 딜쿠샤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언론박물관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을 계획했지만 머릿돌에 새겨진 'DILKUSHA 1923'의 의미를 알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딜쿠샤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6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한국을 찾으면서부터다. 브루스는 딜쿠샤의 사연이 담긴 자료를 서울시에 기증했다.

브루스 테일러는 3·1 독립운동 전야인 2월 28일 경성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당시 일본 경찰은 독립선언서가 인쇄된 종이를 찾겠다며 병원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병원 간호사들은 외국인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기 브루스의 침대 이불 밑에 독립선언서를 숨겼다.

3·1독립선언서를 발견한 앨버트 테일러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생 빌을 불렀다. 빌은 독립선언서 사본과 브루스가 쓴 기사를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떠났다. 3·1만세운동 소식은 도쿄 주재 AP통신사망을 통해 세계로 퍼졌다.

앨버트는 AP통신 임시특파원 자격으로 제암리 학살사건과 3·1 독립운동을 이끈 47명의 민족지도자에 대한 재판과정을 취재해 전 세계에 타전했다. 그는 아시아의 문명국을 자처하던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외국에 알린 유일한 서양 언론인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1942년 테일러 부부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됐다. 이후 방치된 딜쿠샤에는 23명(12세대)이 무단거주했다. 이들 중 다수가 장애인 등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이었다. 딜쿠샤는 장기 무단 점유로 건물 내외부가 훼손돼 2015년 정밀안전진단결과 D등급 판정을 받았다.

서울시와 기획재정부, 문화재청, 종로구는 2016년 '딜쿠샤 보존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딜쿠샤의 원형을 복원해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개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무단 점유 문제 해결이 난항을 겪으며 2018년 7월 마지막 무단 점거자가 퇴거, 같은 해 11월 복원공사에 착수했다.

시는 "2020년 개관을 목표로 복원공사를 추진하고 있으며 공사가 끝나면 독립운동 관련 전시관으로 딜쿠샤를 시민에게 공개할 계획이다"고 전했다.

<참고도서 '호박 목걸이'(메리 린리 테일러,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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