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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외국인 기획자들의 ‘포트폴리오’로 전락한 비엔날레



2년 주기로 개최되는 국제미술전을 비엔날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만 20여개가 운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비엔날레로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를 꼽는다. 국제적 담론생성 측면에선 제 기능을 못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데다 규모 및 예산 등에서 덩치가 작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외국인 기획자들에 대한 선호도가 상당하다는 것도 닮은꼴이다. 광주비엔날레는 2008년 이후 줄곧 외국인 큐레이터를 빼놓지 않았다. 부산비엔날레 역시 2016년을 제외하곤 2010년부터 2018년까지 다른 나라 큐레이터가 전시감독을 맡았다. 대구사진비엔날레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포함해 이들 비엔날레 또한 2020년 개최 예정인 행사에도 이미 외국인 기획자들을 감독으로 확정한 상태다.

동시대성이 강조되고 세계가 초단위로 연결되는 시대, 어느 나라 사람이 예술 감독을 맡느냐는 그리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2022년 카셀도큐멘타 전시총감독으로 선정된 '루앙루파'는 인도네시아 콜렉티브 그룹이고,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마저 외국 작가를 내세우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단, 억대를 넘나드는 세금까지 쥐여주며 극진하게 모셔오는 이상 성과 여부는 따져봐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외국인 감독들이 내놓은 성적표는 볼품없었다. 대체로 동시대미술의 흐름과 예술담론의 틀을 제시하지 못했고, 실험적인 방법론을 통해 현대미술에 관한 의심할 수 없는 세계 문화예술의 각축장을 만드는 것에도 실패했다. 동시대예술의 혁신과 도전, 새로운 담론형성과 방향성 제시 측면 역시 희미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로 끝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동적 파괴로써의 비엔날레는 고사하고 오히려 조직 내 갈등을 유발하거나 편협만 전시를 꾸리는 등 문제만 만든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2014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을 지낸 프랑스의 '올리비에 케플렝'이다. 당시 그는 출품작가 77명 중 26명을 자신과 동일한 국적의 작가로 채워 비엔날레를 '프랑스 작가전'으로 둔갑시켰다. 케플렝은 이 전시로 '보이콧'까지 선언된 전시감독 불공정 선임 논란과 더불어 프랑스 작가 특혜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낸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는 자신이 전시감독을 맡은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단 한명의 한국작가도 초대하지 않아 입질에 올랐다. 광주와 30%가량이나 작가가 겹쳤지만 그는 "한국 작가에 대한 이해부족"을 이유로 철저히 외면했다. 그리고 지오니의 한국 작가 배제는 한국의 비엔날레가 국제적 큐레이터들의 '보따리 장사판'이 되고 있다는 지적에 불을 지폈다.

한국의 여러 비엔날레가 외국인 기획자들의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 혹은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하기 위한 '디딤돌' 역할만 하고 있다는 시선은 단지 곡해로 치부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는 광주비엔날레 감독을 거쳐 베니스비엔날레로 직행했다. '오쿠이 엔위저'도 그랬다.

이외, 2014년 광주비엔날레 감독을 역임한 '제시카 모건' 등, 여타 외국인 감독들 역시 한국의 비엔날레를 통해 인지도가 높아지거나 문화 권력에 한층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이들이 세계적인 디렉터로 주목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사실 한국의 비엔날레가 배경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역대 감독 모두가 자신의 경력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에 예술 감독이 됐다."는 '마리아 린드' 2016 광주비엔날레 감독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누구나 '하랄트 제만'내지는 '퐁튀스 훌텐'이 될 수는 없겠으나, 지난 시간 어떤 비엔날레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낸 외국인 기획자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한국 비엔날레들의 유별난 외국인 사랑은 기이하다. 전시의 질을 담보하는 최선의 카드인지 의심할만한 역사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맹목적 구애는 꽤나 가난해 보인다. 행여 문화사대주의와 근거 없는 선민사상 아래 한국 기획자들의 문화적 역량을 스스로 폄하한 결과는 아닌지 모르겠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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