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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임시정부100주년] <5> 독립운동의 자금줄 독립공채

단재 신채호 선생./국가보훈처 블로그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역사서인 조선상고사에서 윈스턴 처칠의 명언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를 되새겼다. 그는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이자 신민회의 간부로서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진력할 것을 계몽했다.

1910년 단재는 일제의 침략 아래서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 신민회 간부인 안창호, 이갑, 이종호등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이어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선포하고 장차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할 구상을 수립했다. 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토지개간사업·무관학교 설립·교관양성·전문기술자 확보 등을 결의하며 의병활동을 도왔다.

이같은 단재 선생의 노력처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1945년 해방 전까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지속됐다. 그러나 서양 열강과 일본의 조정간섭이 점차 노골화하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의병활동을 위한 자금 조달은 힘들어지고 음지에서 활약하던 선조들의 삶도 피폐해져갔다.

(왼쪽부터) 전시보국채권과 대동아전쟁국고채권.



◆ 일본, 조선의 돈맥을 마르게 하다

을사늑약이 이뤄진 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먼저 조선의 자금을 마르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중 하나로 일본은 조선으로 하여금 많은 빚을 떠안게 해 경제적으로 혼란을 유도하고 이익을 얻으려 했다. 이에 일본은 1905년부터 2년 간 조선의 화폐를 정리한다거나 국가운영에 필요한 시설을 건설한다는 이유 등으로 높은 이자의 돈을 빌려줬고, 그 결과로 당시 1300만원이라는 거액의 빚을 조선에게 요구했다. 빚은 당시 조선에게 크나큰 위협이 되며 일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에 상업은행을 짓고 채권을 팔았다.

전시보국채권과 대동아전쟁국고채권은 일제의 태평양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1942년부터 임시자금조정법에 의거해 일본권업은행에서 발행한 채권으로 우리 민족에게 강제로 판매됐다. 그러나 미국 공군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 본토 공습, 그리고 1945년 8월 8일 소비에트 연방의 만주 전략공세작전으로 일제가 패망하면서 당시 채권자들은 원금을 상환받지 못하게 됐다. 채권의 도안에는 이 때의 전시상황을 암시하는 전투기, 탱크, 군함 등이 새겨져 있다.

(왼쪽부터) 달러 독립공채와 원화 독립공채./한국예탁결제원 증권박물관



◆ 임시정부, 채권으로 독립 자금 모아

일제가 채권을 통해 군자금을 조달한 것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채권으로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았다.

애초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상하이에 주재한 우리 동포에게 인구세(人口稅)를 부과해 예산을 조달하는 것 외에 국내·외 각지에서 오는 군자금을 모아 충당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임시정부를 운영해 나가기가 어려워지자, 1919년 11월 29일 독립공채조례를 비롯해 공채표발행규정·공채모집위원규정 등을 아울러 제정·공포했다. 독립공채가 유통되면 거액의 자금이 조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임시정부는 연 5% 이자의 원화 독립공채와 연 6% 이자의 달러 독립공채를 1919년부터 정부가 수립된 해인 1948년까지 29년간 찍어냈다. 공채의 액면금액은 1000원·500원·100원의 3종류와 1000달러·100달러·50달러·25달러·1달러 등 5종류로 정했다. 조선이 독립한 후 5년에서 30년 내에 원리금을 갚는다는 조건도 걸었다. 달러 공채에는 구미위원부집정관 총재 이승만과 구미위원장 김규식의 서명이 날인돼 있으며, 원화 공채에는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인 이시영의 직인이 날인됐다. 당시 이승만은 독립공채를 미국 하와이에서 발행해 뉴욕의 월스트리트가로도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공채는 외국인에게도 응모하게 했으며 응모액이 1만원을 초과하면 특별 포상을 수여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리 냉담했다고 전해진다. 채권 상환의 전제가 당시 국제적으로 음지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독립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재미동포들과 국내 지주들이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채권 매수에 나서 상당량의 독립공채가 유통되는데 성공했다. 특히 미주 하와이 일대의 한국 동포들이 1000원권 공채를 가장 많이 매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인 1919년부터 1945년 동안의 예산·결산을 충당하는 실적을 올렸다.

독립공채는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근거로도 적용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대한민국의 유산으로 꼽힌다.

1983년 발의된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 조치법안'은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국의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인 '독립공채'를 현 정부가 책임을 지고 상환해주도록 한 내용이다.

이같은 상환조처법 제정은 임시정부 시절 발행한 채권을 1980년대 정부가 책임을 지고 상환해준다는 의미로, 1919년 당시 정부와 지금의 정부가 동일한 정부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일각에서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 때를 대한민국의 수립으로 본다면 건국 이전의 공채를 상환해줄 의무가 없어 국회에서 이 법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100분의 1에도 못미친 독립공채 상환율

국내외 동포들의 헌신으로 상당량의 독립공채가 매수돼 대한민국의 독립을 도왔던 역사와 달리, 독립 후 채권의 상환율은 저조했다.

1950년 6월1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울에 사는 안 모씨는 독립공채의 상환을 요구했지만 정부가 이를 거절했다고 전했다. 기사에서는 상환 의무와 그에 따른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독립공채의 본격적인 상환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 이뤄졌다. 1983년 국회가 독립공채 상환조처법을 통과시키면서다. 발행 당시 9320원 정도였던 채권은 64년 만에 원금과 이자를 합쳐 1만배 가까이 가치가 불어났고, 현재 가치를 기준으로 1억800만원이라는 거액이 됐다. 특별법은 국내 상환 신고 기간을 2000년 12월 31일까지로 설정해 현재 독립공채 상환의무는 종료된 상태다. 1984년부터 2000년까지 신고된 건수는 총 57건으로, 실제 독립공채 채권 발행량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독립공채의 상환율이 저조한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으나 당시 증권 거래가 종이로 된 실물을 주고받는 데서 이뤄졌기에 수십년간 실물 증권을 보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크다. 이어 일제가 독립공채를 보유하는 것 자체를 불법으로 삼았기 때문에 매수한 독립공채를 본인이 직접 없앴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독립공채가 전시된 한국예탁결제원 증권박물관 관계자는 "독립공채는 상당했던 발행량에 비해 상환율이 저조한 것으로 알려진다"며 "안타까운 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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