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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지역

[되살아난 서울] ⑩ 대통령의 은밀한 지하벙커, '살아있는 교과서'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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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A 지하벙커 전시실. 이곳에서 지난 1일 시작된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기획전은 다음달 15일까지 열린다./김현정 기자

 


서울 여의도 환승센터 신호등 옆에는 'SeMA(Seoul Museum of Art·서울시립미술관) 벙커'라고 쓰인 출입구가 있다. 버스를 타고 내리는 일상 한가운데 놓인 이 문은 지난해 서울 시민이 선정한 '잘생겼다 서울' 중 한 장소로 통한다.

지난 1일 오후. 엘리베이터처럼 생긴 문을 열고 계단에 발을 내렸다. 사방이 하얗게 칠해진 벽, 꿉꿉한 냄새가 한때 이곳이 지하벙커였음을 가르쳐준다. 지하실 특유의 공기에 차츰 익숙해질 즈음, 지하 2층 깊이의 계단을 다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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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환승센터 신호등 옆에 있는 SeMA 벙커 입구.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모양이다./서울시립미술관


여의도 지하벙커로 불리는 이곳은 2005년 5월, 여의도 환승센터를 짓기 위한 현장 조사에서 발견됐다. 인부들은 자물쇠가 채워진 입구 사이로 내시경을 넣었다. 발견 당시 무릎까지 물이 차 있던 벙커는 지휘대와 기계실이 갖춰진 경호원 대기실(180평·약 595㎡), 화장실과 소파가 구비된 VIP실(20평·약 66㎡)로 꾸며져 있었다. 이들은 한때 지하 비밀 시설이었던 역사의 현장에 열쇠를 꽂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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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SeMA 벙커로 내려가는 지하계단. 지하 2층 깊이의 계단을 내려가며 꿉꿉한 지하실 냄새에 익숙해질 때 쯤 벙커 내부에 도착하게 된다./서울시립미술관


하지만 국토교통부나 수도방위사령부 어느 곳에서도 지하 벙커 관련 기록을 찾지 못했다. 다만 국군의 날 행사 때 사열대 위치와 벙커의 위치가 같다는 점, 1977년 이후 항공사진에서 벙커의 출입구가 확인된다는 사실 때문에 벙커가 박정희 정부 시절 만들어진 방공호로 추정되고 있다. 시는 이 공간의 역사적 상징성을 인정해 2013년 이곳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2016년부터 설계와 새 단장을 거친 지하벙커는 지난해 10월 19일,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SeMA 벙커로 시민 품에 돌아왔다. 이제 경호원 대기실은 미술품 전시 공간으로, VIP실은 역사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1월까지 이곳을 찾은 시민은 총 1만8450명에 이른다. 하루 평균 246명의 시민이 이곳 벙커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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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단위로 'SeMA 벙커 역사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들이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전시물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김현정 기자


◆"감회가 새롭네"…살아 돌아온 역사의 한 장면

상설전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 열리는 'SeMA 벙커 역사 갤러리'의 벽면에는 역사책에서 보지 못한 인물들의 쓸쓸한 표정들이 걸려있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 홋카이도와 러시아 사할린, 남태평양 섬으로 끌려간 우리 동포의 얼굴이다. 지난 1일 시작된 전시회는 다음달 15일까지 열린다.

시민들은 전직 대통령의 비밀공간이 역사 교과서로 돌아온 모습을 반기고 있었다. 서울 중구에서 온 우지영(40) 씨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사진 속 동포들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우씨는 "일본 분들과 함께 공부하는 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훗카이도에 강제 연행된 사람들에 대한 전시 소식을 듣고 조카들과 같이 오게 되었다"며 "강제 동원된 희생자들의 귀향이 하루빨리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장 모퉁이를 돌아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좁은 복도가 보인다. 그 끝에는 소파가 놓인 방 하나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1970년대 후반 VIP실로 쓰인 장소다. 흑백 점박이 무늬 소파 여덟 개는 2005년 발견 당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소파 발견 당시 물에 잠겨 천이 삭았기 때문에, 박물관은 그 틀만 유지하고 비슷한 천으로 대체했다. 화장실 변기와 바닥 타일도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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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VIP실로 쓰인 장소에서 한 관람객이 벙커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다./김현정 기자


서울 서대문구에서 손녀와 함께 온 전호용(67) 씨는 "1973년 군대에 있을 당시 알음알음 뜬 소문으로만 들었던 지하 벙커가 실제로 존재하고, 두 눈으로 직접 박 전 대통령이 앉았던 소파와 화장실 변기까지 보고 나니 감회가 새롭다"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씨는 이곳을 '살아있는 교과서'라고 불렀다. 그는 "지하 벙커는 냉전 시대 산물"이라며 "박정희 독재 통치하에 이런 슬픈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후손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씨는 관람을 끝낸 뒤에도 한참 동안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도시재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지하벙커는 후한 점수를 받았다. 우씨는 "요즘 사람들은 옛 건물들이 창피하고 누추하다는 이유로 다 없애고 깨끗하게, 남들 보기 좋게 새롭게 짓는 경우가 있는데, 벙커는 그 모습 그대로 복원해 지은 점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고,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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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벙커 전시실 내부에서 녹물이 떨어지고 있다./김현정 기자


◆천장서 빗물 새고 화장실·해설사도 없어…"저예산 운영 탓"

지하벙커의 치명적인 단점은 화장실이 없다는 점이다. 전체 200평 규모의 전시장 내부를 둘러보려면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주말엔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이날 부모들은 화장실을 찾는 아이들 앞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벙커 발견 당시 근처에 IFC몰과 신한증권 건물이 들어서 있는 상태였다"며 "이 지정물들의 수도관, 도시가스관, 통신관들이 주변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이를 피해 공사하려면 사업비가 너무 많이 들어 화장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비 오는 날 전시관 천장에서 빗물이 새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시 관계자는 "197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이 노화된 탓"이라며 "벙커를 부수면 역사적인 가치가 훼손돼 최대한 원형을 살리려다 보니, 시설을 보완했음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면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미술관 측은 다음 달 15일까지 이어지는 전시가 끝나면 누수 보수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해설사가 없어 불편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여의도 인근에서 근무해 벙커를 자주 찾는다는 박모(26) 씨는 "전시관에 도슨트(전문 해설사)나 오디오 가이드가 없어 전시를 봐도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어 이해하기 어렵다"며 눈썹을 찌푸렸다.

전시관 지킴이 김유진(22) 씨 역시 "관람객들이 가끔 작품 설명을 부탁해올 때가 있는데, 전문 해설사가 아니어서 곤란할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이에 대해 미술관 관계자는 "예산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라며 "관련 부분을 최대한 보완해 다음 전시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답했다.

지하벙커의 1년 예산은 약 1억6000만원으로,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전시 하나에 드는 비용이다. 턱없이 적은 예산으로 돌아온 벙커에 관람객 수는 점차 줄고 있다. 지난해 11월 6812명이던 관람객은 2달만인 1월 2824명으로 약 4000명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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