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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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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카페 문은 허름했다. 그냥 통나무에 널빤지를 덧댄 문이었다. 엉성했다. 바람이 살짝 밀쳐도 삐거덕 나뭇결 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문을 여는데 그 소리가 아니었다. 뜻밖의 울림이었다. 딸랑딸랑! 종소리다. 맑고 청아했다. 마치 동그라미를 그리며 호수 가장자리까지 퍼지는 물결처럼 가슴으로 번져 왔다. 참 따스했다. 소리를 내는 쪽을 보니 문 꼭대기 귀퉁이에 매달린 풍경(風磬)! 호젓한 산속에 은자처럼 들어앉은 카페는 기분 좋게 종을 울리고 있었다.

카페 지붕엔 산새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수런댔다. 은은한 풍경소리와 재잘대는 새소리. 한해의 끄트머리에 홀로 선 산속은 그렇게 색감 다른 울림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기로에서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건 종소리. 그것은 비단 세밑이 다가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 오랜만에 들어보는 쇠붙이 울림이 정겨워서일 게다. 디지털오디오 시대에 라이브 종소리를 듣는 게 어디 흔한가. 크고 웅장하게 울리는 보신각의 종이 아니어도 산속을 다독여주기에 충분했다.

하루의 시작을 종소리가 열어주던 시절이 있었다. 골목골목을 메아리치던 두부 장수의 종소리는 자명종이었다. 매일 새벽녘 정적을 깼다. 마을이 들썩거렸다. 뜨끈뜨끈한 두부를 사달라고 종을 마구 흔들어댔다.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 자꾸 보채는 종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두부를 팔아줘야 했다. 학교에도 땡땡 울리던 시절이 있었다. 당번 선생님이 종을 쳤더랬다. 수없이 울려댔다. 종소리가 메아리칠 때마다 운동장의 아이들은 밀물이 되고, 썰물이 됐다.

학창시절 방학 때 시골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마을 이장님이 치는 종도 들었다. 시골의 숲속 공기와 강바람을 쐰 쇠붙이라 그런가. 촌스럽게 들렸다. 그런데 음색이 달랐다. 설렘과 기쁨이 묻어 있었다. 아침 햇살이 맑아서인지 마을 표정도 따스했다. 알고 보니 이웃집 혼사를 알리는 종소리란다. 신비했다. 종소리에도 표정과 감정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만약 흉사가 생겼더라면 안타까움과 슬픔이 배어났을 터다. 물난리라도 났더라면 다급함이 실렸을 거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엔 종은 단순히 소리만 내는 쇠붙이가 아니었다. 종소리엔 갖가지 사연들이 담겨 있었다. 마을 이장님의 종소리가 경조사에 따라 음색 다르게 읽히는 까닭일 것이다. 두부 장수의 종소리에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한다는 간절함이 들어 있었던 거다. 녹슨 학교 종은 그땐 몰랐지만 선생님의 노고가 스친 흔적이었다. 휘황찬란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울리는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는 추운 이 겨울 그늘진 이웃을 도우려는 애틋함이 묻어난다.

종은 마음의 거울이기도 하다. 마음결에 따라 온기 다르게 들려서이다. 마음을 비우고 들으면 해맑은 언어들이 밀려온다. 정결하게, 산뜻하게, 따뜻하게, 잔잔하게. 때론 감동으로 다가온다. 걱정을 잔뜩 안고 듣는다면 처연하고 무겁게 느껴질 터이다. 소리에 무슨 무게와 모양이 있겠는가. 걱정의 무게가 더 얹혔을 뿐인데 더러는 천근만근으로 들린다. 칙칙한 소리를 내려고 탄생하는 종은 이 세상에 없다. 무슨 소리든 마음을 다스리고 경청하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그 끄트머리에서 서성거리는 종소리엔 공허함과 설렘이 뒤섞여 있다. 며칠 후면 한 해를 접는 대단원의 커튼을 내려야 하고, 새 해의 시작을 알려야 해서다. 종소리는 세월의 벗인 것이다. 불을 밝히고 있는 스마트폰 달력에 시선이 머문다. 맨 아래 줄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카페의 통나무 문에 매달려 딸랑거리는 종을 바라보면서. 새해에는 저 청아한 종소리처럼 밝고 설레는 일들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번지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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