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월! 달력이 다 뜯겨나가고 달랑 한 장 남았다. 계절도 마지막 겨울을 스케치하고 있다. 봄꽃이 피고, 땡볕에 달궈지고, 낙엽 흩날리는 계절을 지나 이제 찬바람 스미는 길목에서 서성거리는 달력 한 장. 동네 장터의 허름한 선술집 달력은 그렇게 벽면에 매달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달랑과 마지막. 듣기에도 쓸쓸한 수식어가 붙어서일까. 처연하다. 한 해를 되짚게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뜯겨나간 열한 장을 합친 무게 보다 달랑 한 장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 너덜거리는 달랑 한 장이 왜 그토록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벽면을 부여잡고 있는 그 십이월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달랑은 그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되물어올 것만 같다. 정초에 결심한 일에 얼마나 매진했는가. 허투루 허송세월하지 않았는가. 가족과 친구, 이웃에게 늘 감사하고 배려했는가. 저무는 한해를 갈무리하면서 아쉬움이 어찌 없겠냐마는 좀 더 잘 할 걸, 잘 해줄 걸, 제대로 할 걸 같은 회한들이 밀물져온다.
달력은 신통방통한 녀석이다. 태생적 어원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캘린더(calendar). 라틴어에서 유래했다는데 그 의미가 대차대조표다! 그러고 보니 달력은 삶의 대차대조표에 다름 아니다. 달력에는 보석 같은 값진 시간들이 흐른다. 열두 개의 보물섬이 있는 것이다. 때론 녹슨 시간들이 보물섬을 탁류로 만들곤 한다. 달력은 어쩌면 금광석을 캐고 곱게 세공(細工)해서 보석처럼 빛나는 시간의 순이익을 창출하라고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순이익! 그것은 사랑, 진실, 베풂, 배려, 나눔, 포용, 감사하는 밝고 맑은 시간, 뭉뚱그려 지혜로운 시간들이다. 보물섬엔 금쪽같은 시간만 있는 게 아니다. 증오, 거짓, 욕심, 시기, 질투하는 암흑의 시간들도 있다. 그 암흑의 편린들도 공을 들여 조탁하면 증오는 사랑, 거짓은 진실, 욕심은 나눔과 베풂, 시기와 질투는 배려와 포용이라는 보석으로 각각 거듭날 것이다. 그랬다. 그런 순이익을 창조했기에 인류의 스승들이 등장하고, 세상은 진화하고 발전했다.
태양은 매일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녹슨 시간을 비우고 새 시간을 채워주는 빛의 경이! 태양은 변함없이 떠올랐지만 그것을 미처 몰랐다. 눈부시도록 그 가르침을 비춰 줬건만 알지 못했다. 썰렁한 선술집의 달력을 유난히 무겁게 하는 건 인쇄 박힌 숫자 아래 펜으로 꼭꼭 눌러 쓴 또 다른 숫자들. 얼핏 보아 이 집 가계부다. 공과금, 월세값, 돼지고기 물량과 가격 같은 수치일 것이다. 여러 겹으로 동그라미를 표기한 날짜는 사랑하는 가족 누군가의 생일일 게다.
선술집의 달력이 왠지 기특하다. 달력 찍어내는 소리가 예전만 못한 디지털 시대에 점방 맨 중앙 벽면에 메뉴판처럼 떡하니 붙어 있으니 말이다. 내 어릴 적엔 더 기특하고 고마웠다. 교과서 겉 부위가 닳을세라 겉장을 싸는 덮개가 돼주곤 했다. 허전한 벽면을 즐겁게 채워주기도 했다. 여행이 흔치 않던 그 시절엔 월별로 계절별로 잘도 구성한 열두 폭의 국내 명소 풍경은 색다른 구경거리였다. 여기가 어딘가요? 첫 말문을 트게 하는 물꼬였으며, 소통의 창구였다.
달랑 한 장을 남긴 달력. 찬바람이 불어오자 시계추처럼 일렁인다.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물결친다. 한해를 마무리한다는 게 이렇게 쓸쓸한 것인가. 얼마 후면 종이든 디지털이든 새 달력 앞에서 세상은 달뜰 것이다. 모두가 새로운 꿈과 희망을 안고 출발점에 서니 그럴 터다. 사계절이 수놓는 열두 고갯길과 강을 굽이치며 저마다의 삶의 일기를 써내려갈 것이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얼굴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내년 이맘때 이 시간이 어떻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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