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의 시시일각] 부담스러운 뒤풀이 문화

[홍경한의 시시일각] 부담스러운 뒤풀이 문화

최종수정 : 2017-08-20 11:05:04

[홍경한의 시시일각] 부담스러운 뒤풀이 문화

▲ 홍경한 미술평론가·칼럼니스트

10여 년 전, 한 지인의 모 미술상 수상을 기념하는 뒤풀이에 휩쓸리듯 참석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겠다, 부어라 마셔라 할 것이 뻔해 솔직히 처음에는 어떻게든 가지 않으려 갖은 '꼼수'를 부렸다. 그러나 인정(人情) 탓에 결국 자리 하나를 턱하니 차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과 정신이 분리된 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참으로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다들 몽롱한 상태에 젖어들었는데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는 나 홀로 또렷한 정신으로 멀뚱거리자니 일각 여삼추(一刻 如三秋)요, 잔뜩 취한 누군가가 다가와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려주던 상황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지루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한참 지나서야 자리가 파했고, 난 비로소 해방됐다. 빼앗긴 주권을 다시 찾기까지 36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겨낸 광복의 기쁨이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되찾은 자유로움이 주는 만족감은 컸다. 그러면서 그날의 기억은 잡지 마감하랴, 강의하랴 기타 등등 여러 일로 인해 자연스럽게 잊혔다.

며칠 후, 그 지인으로부터 참석해줘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다. 늘 그렇듯 이런 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의 고통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카락이 희한하다는 이유로 어떤 덜떨어진 교수에게 멱살까지 잡힌 봉변마저 함구했다. 술에 취하면 거름 밭의 돼지로 돌변하는 사람을 친구로 둔, 억세게 운 나쁜 자신에게 놀랄까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작 놀란 건 나였다. 시상금으로 받은 거액을 그날 뒤풀이 비용으로 모두 소진했다는 것이 그랬고, 덕분에 아내한테 온갖 잔소리는 다 들어야했다는 후일담이 그랬다. 그의 아내는 작업하는 남편과의 삶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온 이였는데, 그런 그가 화를 냈다는 건 상서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후문으론 뒤풀이로 시상금을 탕진한 그날 이후 부부의 가치관은 '자식들 때문에 산다'로 변했다고 한다.

한참이 지난 일화지만 다시 꺼낸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리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미술계 뒤풀이 문화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것. 실제로 지금도 매주 수요일 사간동이나 인사동에 가면 인근 식당과 주점에는 미술인들로 넘쳐난다. 그림이 팔릴지 장담할 수 없음에도 끝까지 남아 뒤풀이 비용을 대는 또 다른 10여 년 전의 지인 같은 이들도 만날 수 있다. 어느 동네든 전시가 열리는 첫날의 풍경은 온 나라가 대동소이하다.

문제는 이처럼 미술계 관습처럼 여겨온 먹고 마시기식 뒤풀이 문화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전시 작가가 모든 것을 부담하는 관행 역시 벗어나야 한다. 혹자는 그깟 밥한 끼 갖고 뭘 그리 야박하게 구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으나, 그게 또 그렇지 않다. 망조 들린 로마처럼 '빵과 서커스'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작가들의 삶은 되레 팍팍해졌음을 고려하면 밥숟가락 하나 더 놓는 것도 녹록하지 않은 탓이다. 생각해보라, 미술인 년간 평균 수입이 600만 원대인데 밥값으로 한 번에 수십만 원에서 백만 원 단위를 지출한다는 게 타당한지.

뒤풀이 대신 작품을 놓고 가볍게 차 한 잔 마시며 진중하게 대화해도 좋고, 작고 알찬 토크나 비평 시간을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수입과 지출이 현격히 불균형한 작가들의 현실을 알고 있다면 뒤풀이 비용을 혼자 책임지게 하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나마 미술계 한쪽에선 변화의 물꼬가 조금씩 트이고 있어 다행이다. 작가와 관객이 교감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거나 아예 뒤풀이를 생략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축하해주러 온 주변 작가들 또한 동병상련의 마음 아래 뒤풀이는 생략한 채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작은 소품을 구입하는 가하면, 어쩔 수 없이 뒤풀이를 하게 되어도 비용은 각자 낸다. 다만 이런 현상이 아직은 보편적이지 않다. 여전히 우리 주변엔 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뷔페식 상차림도 부족해 2차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먹으러 왔는지 작품 보러 왔는지 모를 현상과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이 또한 적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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