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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마중물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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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하! 후텁지근하다. 그 시원한 살랑바람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기껏 불어오는 굼뜬 바람도 진땀을 뺐는지 끈적끈적하다. 열대 우림에 덮인 느낌이다. 이런 찜통더위를 어디 한두 번 겪는가마는, 매번 낯 설은 여름 대하듯 호들갑을 떤다. 계절의 진통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아우성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산과 강, 들녘을 때맞춰 새 옷으로 입혀주는 그 고마운 계절을 무관심속에, 그저 오면 오는가보다 가면 가는가보다 싶게 살아왔다.

여름의 열정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피서 대열에 오르는 길. 차창 너머로 헉헉대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처 몰랐던 계절에 대한 상념들이 불쑥 떠오른다. 계절은 늘 조신했다. 밤낮 모르게 조용히 저 먼저 달려와 계절의 길목에 살포시 앉아 있었다. 아지랑이를 피어 올릴 때도 그랬고, 꽃봉오리를 맺을 때도 그랬고, 싹을 틔울 땐 산고가 있었지만 결코 소리 내지 않았다. 꽃피울 땐 더 조신했다. 한 잎 한 잎 숨죽이듯 펼치더니, 무더기무더기 꽃 사태로 깜짝 놀라게 했다.

몇몇 꽃들은 제 날인줄 알고 때 이르게 나와 겸연쩍어하곤 했지만, 그 착각을 불러일으킨 땡볕바람은 여름의 길목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연초록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숲은 산그늘 아래에서 땀을 들이며 그토록 찜통더위를 경고했건만 생각이 거기까진 닿진 못했다. 무덤덤했다. 계곡도 쉬어가라 했지만 그냥 스쳐지나갔다. 물결치는 푸른 들녘이 손짓했지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고서야 깊어가는 황금빛 가을이 왔음을 알았다.

울긋불긋한 단풍에 흠뻑 빠졌다가, 겨울이 온 줄도 몰랐다. 낙엽 구르는 소리조차 나지 않음을 느끼고서야 알았다. 전날 밤 조용히 흩뿌려 놓은 논배미의 싸락눈을, 산정의 첫 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이제 겨울인가 싶었다. 사계절은 그렇게 슬그머니 찾아와 시나브로 저들의 색을 입힌다. 볕을, 풀을, 꽃을, 단풍을, 눈송이를, 바람을, 안개를, 비를, 아지랑이를 데려와 풍경을 만들고 숨을 불어넣는 그 계절의 장엄한 신비를 그냥 스치듯 하나의 온도로만 느꼈다.

기억 한 장이 날개를 펼친다. 고향 마을의 한 장소는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물 펌프가 있는 곳이다. 펌프질해 땅속의 물을 퍼 올리는 수동형 수도였다. 무더운 여름날 손잡이를 쑥쑥 눌러 길어 올린 얼음물이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곤 했다. 펌프는 묘했다. 저 갈증부터 풀어주지 않으면 물 한 방울도 주지 않았다. 한 바가지 물을 부어줘야 땅속에서 잠자는 물을 콸콸 불러냈던 것이다.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펌프질에 동력을 실어줄 물이 필요했던 거다.

그 물을 마중물이라고 부른다. 물이 물을 길어 올리는 광경! 그것은 귀한 손님을 마중하는 자세이며, 식수가 되어달라고 설득하는 모습이다. 펌프는 마중물 한 바가지를 부어주면 엄청난 물로 보답해주었다. 펌프는 이런 식으로 매번 마중의 지혜를 가르쳐줬지만, 그땐 몰랐다. 펌프는 늘 속을 비워두고 있었지만, 그 속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렇다. 지금 날씨가 무덥고 짜증스런 것은 여름을 헤아리고 받아들일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없는 탓인지도 모른다.

찜통더위가, 맹추위가 닥쳐서야 겨우 계절을 눈치 채고 아우성치는 일상이다. 차안 라디오에서 누가 '무더위에 지친 몸들 힘내시라'고 던지는 말 한마디가 청렬(淸冽)한 마중물처럼 들린다. 지친 마음에 긍정의 힘을 실어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마법의 법칙이 있다면 마중물만한 게 있을까 싶다. 한 바가지 마중물이 많은 양의 식수를 끌어올리듯, 한 마디의 마중감동이 더 큰 감동을 끌어낸다. 이 여름, 마중감동 하나씩을 마련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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