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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40년 비하인드 스토리] (23)일제도 서울지하철 건설 추진했다

[서울지하철 40년 비하인드 스토리] (23)일제도 서울지하철 건설 추진했다

옛 서울역 전경 / 국가기록원



일제 치하인 1939년 12월말 일간지에 서울지하철 건설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조선총독부에서 성동역~동대문 구간 지하철 부설을 다시 논의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서울은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로 경성부라고 불렸다. 경기도청과 경성부청에서는 수도권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지하철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허가권자인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보류 입장이었다. 중일전쟁으로 인해 철재와 시멘트 등 건축자재난이 심한 시기에 지하철 건설은 시기상조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철도국에 근무하는 기사들 중 소장파들 사이에서 경성부의 외관을 감안해서라도 지하철 건설을 허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수뇌부에서 지하철 건설을 재논의하게 된다. 기사는 허가가 날 것 같다는 전망으로 끝나지만, 실상 지하철 건설은 자재난을 이유로 결국 무산된다.

일제가 서울지하철 건설을 추진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최초의 지하철인 아사쿠사~우에노 노선이 개통된 게 1927년말인데 이듬해인 1928년 조선철도주식회사가 경성역에서 동경성역(청량리역)까지 지하철을 놓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9년 뒤 경성 도시계획에 포함된다. 경성부는 1937년부터 장기도시계획을 시행하는데 여기에 철도국이 지하철 건설 계획을 끼워넣었다. 당시 경성부는 인구 100만을 목표로, 경성부 주위를 현재의 그린벨트와 같은 개념인 농경지로 둘러싸고, 그 외곽에 전원도시를 만들어 인구를 분산시킬 계획을 세웠다. 경성부와 전원도시는 순환도로로 잇고, 지하철이 도로를 가로질러 교차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경성부는 이 전쟁도 지하철 건설의 명분으로 활용한다. 공중폭격에 대비해 방공시설이 필요하다는 명분이었다. 지하철은 당시 대표적인 방공시설이었다.

이 명분을 바탕으로 서울지하철 건설 프로젝트는 급물살을 타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되레 발목이 잡힌다. 전략자원인 철근이나 시멘트 등 건축자재가 부족해지자 당국이 통제에 나선 것. 지하철 건설 계획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그 노선 계획안만이 남아 1974년 최초의 지하철인 종로선(1호선 일부 구간) 건설에 영향을 미친다.

일본은 대한제국 시절인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를 부설한다. 만약 최초의 지하철마저 일제에 의해 건설됐다면 일본이 우리 국토에 남긴 흔적은 더욱 짙어졌을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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