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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만년필의 글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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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이따금씩 습작을 할 때 만년필로 쓴다. 너덜거리는 원고지에, 따스한 햇살을 초대하고, 향 그윽한 원두커피 한 잔을 곁들이면 팍팍한 마음이 녹는다. 무얼 긁적거리려나? 궁금했는지 봄 햇살이 저 먼저 원고지에 걸터앉아 아지랑이 파티를 연다. 종이 냄새가 풀풀거리는 누런 원고지, 물기 젖은 잉크, 짙은 커피 향. 만년필에 그토록 집착하게 된 건 이런 고전적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스마트워크 시대에 잊혀져 가는 육필(肉筆)에 대한 정감을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문득 책 앞장에서, 행간에서 만년필로 쓴 글씨를 발견할 때마다 흑백 필름이 스친다. 아! 그때 그랬었지. 세월은 흘렀어도 육필에는 여전히 숨이 붙어 있다. 한자 한자가 감탄사이고, 더러는 그 때 그 시절의 표정과 몸짓들이 보인다. 책과 연을 맺었던 문청들의 눈매가 아른거리고, 목소리가 들린다. 어쩌다 밑줄 친 행간에 쓴 메모를 읽노라면 번민이 와락 가슴으로 밀려든다. 육필의 힘이란 게 바로 이런 걸까. 내 만년필이 원고지를 긁적거리며 뛰노는 까닭이다.

만년필이 문청들의 전형이 된 시절이 있었다. 만년필 곁에는 늘 원고지와 커피 한 잔이 따라 다녔다. 7080 다방 풍경이 그런 모습을 담았더랬다. 저마다 칙칙한 다방 한 귀퉁이 자리를 차지하고는 식은 커피를 마시며 원고지에 시 몇 줄을 긁적거리곤 했다. 당시 커피가 시 구절에 단골 메뉴로 등장한 배경일 것이다, 그러나 코끝에 오래 머무는 원두커피는 아니었다. 더러는 쓰디 쓴 블랙으로 마시긴 했어도 대개가 커피가루, 프림, 설탕을 혼합한 다방식 커피였다.

내 만년필을 추억의 뒷장으로 넘긴 건 기자용 노트북이었다. 1991년, 신문사 서너 군데에 처음 노트북이 지급됐다. 들고 다니는 미니컴퓨터. 다들 신기해했다. 문제는 원고작성이었다. 손 글씨에서 자판 글씨로의 전환. 그건 아날로그 문명에서 디지털 문명으로 넘어가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이정표 앞에서 펜에 익숙한 손은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 자판을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퉁기는 데 수개월이 걸렸지 싶다.

노트북의 등장과 함께 편집국엔 원고지가 사라졌고, 속도전을 펼치는 자판 소리만 요란했다. 내 만년필은 유물이 됐다. 그 만년필이 요즘 라이터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글이 떠오르지 않을 때 불을 댕겨주는 것이다. 원고지에 이런저런 상념들을 긁적거리다 보면 불꽃이 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펜촉이 서걱거리는 촉감도 각별하거니와 글자 한자 한자에 나름의 자세가 있고, 표정이 있다. 육필이어서 그런가. 만년필이 마음을 곧게 세운다는 것을 느낀다.

대형 서점이나 문구점을 가면 만년필코너를 들른다. 그렇다고 만년필을 수집하는 마니아는 아니다. 종류에도 관심이 없다. 만년필이 더 이상 골동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일전에 친구는 자신의 애장품이 가방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애장품은 만년필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 마음을 알고, 체온을 느끼고, 때론 함께 눈물을 적시고, 그런 내 삶의 진솔한 궤적을 함께 했기에 그럴 것이다.

반질반질 손 떼가 묻은 만년필. 일상의 삶이 고단하고 답답할 때 내 애장품 만년필은 글 여행길에 오른다. 펜촉은 마주하는 풍경마다 아름답게 채색해 작품을 탄생시킨다. 파란 하늘 아래 꼬불거리는 길섶은 그림 감상문이 되고, 그 주변에 알록달록 춤추는 봄꽃은 시가 되고, 편지가 된다. 정물화만 있는 게 아니다. 저만치 고즈넉한 시골 고샅길에서 들려오는 연인들의 이야기들은 에세이가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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